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반짝햇님 Sep 29. 2021

원룸과 노부부

20년 뒤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친구랑 어제 꽤 오래 통화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고 남편도 출근해 간만에 허락된 수다 타이밍이었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친구의 신혼 적응기와 근황을 이야기하다 갑자기 청소 이야기로 넘어갔다. 신혼집으로 막 입주한 친구가 살면서 정리해야겠다는 얘길 해서 그랬던 것 같다.

주말에 세 가족이 모두 모여 있으면 남편은 다 같이 놀러 가길 원한다. 물론 다녀오면 아이도 좋아하고 나도 한껏 들떠 좋은 것들을 눈에 담고 온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행복감에 푹 퍼지기도 하고. 내게 행복이란 부드럽고 나른한, 그런 맛이다. 근데 문제는 모두 다 나간 월요일, 화요일이다. 청소하고 빨래하고 반찬만 몇 개 준비해도 시간이 훅훅 가고, 정작 내가 해야 할 일은 조금씩 밀리거나 정체된다. 특히 이번 주는 가을맞이 이불을 꺼내느라 이틀간 세탁기만 몇 번을 돌렸는지 모르겠다.


지난 주말에 다녀온 성흥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골 풍경이 어찌나 아담하고 아름답던지.


사실 나도 외면하고 싶다. 화장실에 막 피기 시작한 붉은곰팡이, 흐트러진 이불과 바닥에 떨어진 먼지나 머리카락, 아직 다 개키지 않은 옷이나 양말 따위. 그래서 통화로 하소연하다가 우스갯소리로 친구에게 한마디 했다.


"난, 우리 애 다 크면 남편한테 나란히 원룸 얻어 이사 가자고 하고 싶어."


친구가 정색한다. 행여 남편한테 농담으로라도 그 말은 하지 말라고. 이 친구와 내가 만난 건 거의 10년 전쯤이다. 지지리 복도 없는 연애를 하다가 헤어지고는 '커플 다 죽어라'라는 마음으로 일만 하던 회사에서 만났다. 오후 8~9시에만 끝나도 일찍 퇴근했다며 술집을 전전하던 그때의 우리, 날을 꼬박 새우며 일한 뒤 퇴근할 때면 취해서 휘청거리는 청년들 보며 "지금 열심히 놀아라. 나중에 열라 야근한다."라고 조용히 빈정거리며 웃었다.

일 외에 가장 많이 나눈 이야기가 있다면 아마도 연애사일 것이다. 10년간 알고 지내며 물리적인 거리가 생겨 자주 못 만난 적도 있지만, 밀린 근황을 업데이트하며 착실하게 서로의 역사를 주거니 받거니 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건 우리 남편과 이 친구는 성향이 비슷하다. 그리고 친구가 결혼한 남자와 나도 접점이 있다. 그래서 내 친구는 내가 남편 흉을 열 번 보면 그중 여덟아홉은 남편을 이해하고 남편 입장을 내게 대변한다.


알겠다고, 알겠다고, 절대  다물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오늘 빨래를 정리하며   일이 생각났다. 집안일 자체가 하기 싫어 원룸을 얻고 싶다기보다 나는 그냥  취향껏 널브러뜨리고 싶을 뿐이다. 그러면서 둘의 원룸을 상상해 봤다. 남편의 방은 아늑하고 갖출   구비한 편안한 동선의 집을 것이다.  방은 좋아하는 것만 있고 나머지는 거의 없는 자극 없는 공간이  테다. 자주 놀러 오는 옆집 양반에게 식사  끼와 커피를 대접할  있는,   정도의 살림, 여가를 장식해줄 책과 음악,  양반이 자고 간다고 하면 같이 덮을 만한 크기의 이불과 베개만 있어도 좋지 . 이런 생각 나만 하는 걸까?


원룸을 구하면 내가 좋아하는 이 접시들은 꼭 가져가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역지사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