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팬데믹으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은 요즘, 작가라는 직업이 새삼 고맙다. 밖에 나가 사람들을 대면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언택트한 직업’ 은 작가가 아닐까, 싶다. 십년지기 노트북과 집에서 일을 하고, 강연 의뢰가 와도 비대면으로 온라인 강의를 하는 경우가 많다.
날마다 집에서 글을 쓰는 것이 간혹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하다. 코로나 팬데믹이 오기 전, 카페에서 커피 마시며 자유로이 작업했던 시간들이 그리울 때도 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집에서 보내는 이 시간들을 잘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일과 생활의 심리적인 거리두기부터, 쾌적한 작업 환경을 위한 청소를 열심히 하는 것 등,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된 요즘은 더욱.집과 어느 정도 아름다운 거리를 두며 친해지려 하고 있다.
네델란드 다큐멘터리 영화 <흐리스티나의 집>을 보며 공감이 갔던 것은, 나에게 너무도 익숙한 공간인 집을 창조적인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소격효과를 배울 수 있어서였다. 물론 이 영화에 나오는 집은, 흐리스티나가 살고 있는 집이 아니지만.
사진 출처 dum
흐리스티나는 불가리아에서 네델란드로 온 불법 이민자 여성이다. 그녀는 암스테르담의 여러 집들을 돌며 청소와 집안일을 하는 가사 도우미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그녀는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청소를 마친 후, 청소를 하기 위해 방문한 집을 찍고 그 집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찍는 흐리스티나. 가사 도우미 일을 하러 간 평범한 공간들은, 흐리스티나가 사진을 찍는 순간 특별한 예술적 공간으로 변화한다.
그 순간 청소를 해야 하는 건조하고 의무적인 공간이 가장 창조적인 공간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흐리스티나의 집>은 불법 노동자 여성이 가사 도우미 직업이란 단조로운 일상을 어떻게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지, 보여준다.
그런데 청소를 하기 위해 방문한 집에서 집주인을 만나는 일은 거의 없다. 아무도 없는 빈 집에 들어가 그 전에 집주인이 남긴 메모의 지시사항을 보고 집안 청소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흐리스티나와 집주인은 대면이 아닌, 그야말로 비대면, 그것도 메모를 통해서만 관계를 맺고 있다. 자신들이 집에 돌아왔을 때 이미 사라져버리고 없는 흐리스티나를 집주인들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긴다.
맞다. 흐리스티나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다. '휴식이자 쉼'이라는 집의 상징성은 흐리스티나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오히려 ‘집’은 불법 이민자라는 이방인의 서글픔을 더욱 각인시켜줄 뿐이다. 그녀가 오르기엔 높고 단단하게만 자리 잡은 수많은 집들로부터 그녀를 소외시키는 또 하나의 집.
하지만 이 집을, 집에서의 날마다 똑같은 일상을, 흐리스티나가 거리를 두고 낯설게 바라보자, 뭔가가 바뀌기 시작한다. 사진작업을 통해 자신의 삶을 향해 본질적인 질문을 하는 그녀에게 암스테르담의 집들은 그저 일하는 공적공간을 넘어서, 사진작업을 하는 가장 사적이면서도 창조적인 장소로 변해버린 것이다.
덤덤하게 삶의 고민을 말하는 흐리스티나의 얼굴과 집안의 사물들이 중첩되어 만든 정제된 장면들은삶에 대해, 꿈을 꾼다는 것에 관해, 웅숭깊은 울림을 던져준다. 실제로 흐리스티나는 이 영화를 찍은 후, 불법 노동자의 신분에서 벗어나 지금은 전업 사진작가로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독창성'을 영어로'오리지널리티(originality)'라고 하는데 '오리지널리티'란 말의 뿌리를 따라가면'처음으로 보았다'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그 누구도 하지 않은 것을 처음으로 하는 것이 바로 독창성인 것이다. 어쩌면 ' 처음으로 본다 '는 것은, 세상에서 지정해준 이름을 넘어서 낯설게 바라보는 시선이 아닐까? 사물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시선이야말로 곧 다르게 보는 것일 터.
그녀는 생활공간이라는 집의 이면을 발견한 예술가다. 그것은 곧 자신 안의 또 다른 가능성도 바라보고, 발견하게 해주었다.
흐리스티나는 말한다. ‘쓸고 닦는 나의 일은 시간의 흔적을 지우는 것’ 이라고. 그래서 그녀가 시간을 놓치지 않고 저장하기 위해 사진을 찍은 것인지도. 사실 우리 모두가 그 모습은 조금씩 다르지만, 흐리스티나와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