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아직 오지 않은 나
커튼이 달려있지 않은 세 개의 병상. 후텁지근하고 건조한 공기. 멀건 유리창을 통해 사정없이 내리쬐는 햇빛. 쉴 새 없이 웅웅 거리는 소음을 내뿜는 거대한 음압기. 일회용 플라스틱에 담긴 식어 빠진 미역국. 퇴원할 때 말고는 단 한 발자국도 바깥으로 내딛을 수 없는 출입문. 푸른색 방호복을 입고 분주히 오가는 간호사들. 종일 눈 뜬 모습을 거의 보기 힘든 할머니. 종일 눈을 치켜 뜨고 간호사에게 욕을 하는 아주머니. 그리고 종일 눈물과 모유를 동시에 쏟아내는 나.
나는 명백히 고통스러웠고, 애매하게 두려웠다.
그곳에서의 7일은 형형한 고통을 감내하는 동시에, 내가 가진 정체 모를 두려움의 형상을 파악하고 이름을 붙이는 데 할애된 시간이었다.
2022년 10월의 끝자락, 강북삼성병원 A관 9층 음압격리 병동은 그 공간에 존재하는 모두에게 지옥이었다. 고통의 이유는 각자 달랐지만, 고통의 양만큼은 다들 공평하게 나누어 가진 듯 누구 하나 일그러지지 않은 얼굴이 없었다.
출입문을 기준으로 첫 번째 병상엔 70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할머니가 있었다. 차분하고 교양 있는 말투를 가진 듯했지만 목소리는 자주 들을 수 없었는데, 주로 잠인지 혼수상태인지 모를 침묵에 빠져 있었고 가끔 눈을 떴을 땐 목이 떨어져 나갈 듯 기침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기침 사이 아주 잠깐의 틈이 생기면 최선을 다해 나긋나긋한 어조로 간호사에게 말을 건넸다. 주로 "여기가 어느 병원이죠?" 라고 묻거나, 간호사들이 대변을 처리해줄 땐 조금 흔들리는 목소리로 "나, 너무, 수치스러워요." 같은 감정 표현을 하곤 했다.
두 번째 병상엔 만 40세 여자가 누워 있었다. 제왕절개 출산 직후 고혈압 증상으로 고위험 산모 치료실에 있다가, 3일차에 돌연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고 격리병동으로 옮겨온 유일한 '산모'. 나다.
출산 하루 전날 시부모님께서는 곧 둘째를 출산할 며느리에게 밥이라도 한끼 든든히 먹이고 싶다며 서울에 올라오셨고, 대수롭지 않은 감기로 생각했지만 사실은 코로나였던 바이러스를 함께 달고 오셨다. 출산 이틀째 밤, 심상치 않은 고열에 시달리던 첫째의 자가키트에 두줄이 떴다는 사실을 남편에게 전해들은 나는 그날따라 이상하게 열이 떨어지지 않는 내 몸상태가 두려워 간호사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원래 제왕절개 하고 나면 염증 때문에 열이 날 수도 있어요, 라며 코로나일 가능성을 외면하려는 간호사에게(입원 중인 산모가 확진되면 수습해야 할 일이 커지니까 이해는 할 수 있었다), 불안해서 그러니 제발 pcr 한 번만 해 달라고 사정을 했다. 왜냐하면 그날 오전, 나는 아기에게 처음으로 모유수유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쩌면 코로나 감염자일수도 있는 나와 그날 가장 밀접하게 접촉한 사람이 태어난지 겨우 이틀 밖에 안 된, 아무런 방어 체계도 갖추지 않은 나의 소중한 신생아라는 의미였다. 밤늦게 방호복을 챙겨 입고 짜증 가득한 얼굴로 내 코를 깊숙이 쑤신 간호사는 두어 시간 후, 코로나 양성이라는 말과 함께 당장 9층으로 병실을 옮길 것을 명했다.
4중 출입문으로 철통 방어중인 격리병동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좀 더 끔찍했다. 이런 위기 상황엔 돈 아끼지 말고 무조건 1인실로 가겠다 마음먹었지만 음압 병상 1인실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코로나에 걸린 환자들끼리는 격리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다양하고 디테일한 고통의 요소들이 사방에 도사리고 있었지만 가장 끔찍했던 건 병상에 커튼이 전혀 달려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간호사에게 들은 이유로는, 코로나 환자 격리 병실이라 의료진들이 꼭 필요할 때 빼고는 출입을 최대한 자제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바깥에서 cctv로 병실 상황을 살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커튼으로 병상을 가릴 수 없다고.
그러나 나는 이제 막 몸에 젖이 돌기 시작한 산모였다. 신생아 중환자실에 격리되어 일주일간 생이별 상태에 놓인 아기에게 모유를 먹일 방법은 없었지만, 속수무책으로 늘어나는 모유를 시간 맞춰 빼내지 않으면 코로나보다 끔찍한 젖몸살에 시달리다 정작 수유를 해야 될 날이 왔을 때 모유가 말라버릴 게 뻔했다. 출산을 한 여자의 몸은 새끼를 먹여 살리게 프로그래밍된 매우 정교한 메카니즘에 의해 작동된다는 사실이 그날의 내겐 참 새삼스럽고 잔인했다. 어쨌거나 나는 결국 가슴을 다 드러내놓고 유축을 해야 하는데 가릴 커튼이 없고, 심지어 카메라로 바깥에 생중계된다는 거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봤지만 별 수 없어 결국 침대에서 벽을 보고 돌아앉아 유축하는 걸 택했다. 인간다울 최소한의 권리를 박탈당한 느낌보다 더 힘들었던 건, 그토록 비참하게 짜낸 소중한 초유를 아기에게 먹여 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화장실 변기에 쏟아 버려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곳에 있는 동안 오롯이 나의 고통에 집중하기가 다소 힘들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세 번째 병상이었다. 고혈압 고열 폐렴이 내 몸에서 퐁당퐁당 발을 넣었다 뺐다 하는 동안, 그 정도는 병도 아니라는 듯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는 6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아주머니가 세 번째 병상의 주인이었다. 나보다 더 아픈데 기운을 내뿜다니 이상한 표현 같지만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뇌수술을 받은 그녀는 움직일 기력이 딸려도 온전치 않은 정신으로나마 분노를 표출할 기운만큼은 넘쳐 흘렀으니까.
구정물처럼 쏟아지는 그녀의 분노를 뒤집어쓸 희생자는 당연히 의료진뿐이었다. 격리병동 간호사들은 그런 극한의 환경 속에서도 놀랍도록 친절한 편이었지만, 그 아주머니에겐 예외였다. 아무리 인내심의 대가라 하더라도 하루 종일 밥을 안 먹겠다고 버티며 쌍욕을 서슴지 않는 사람에게 꾸준한 친절을 베풀기는 어려웠으니까. 밥을 드셔야 약을 드실 수 있어요 어머님, 하고 사정해도 절대 입을 벌리지 않자 간호사들은 밥 먹이기를 포기하고 약이라도 제때 먹어 주길 간청했다. 꾹 다문 채 버티는 아주머니의 입을 벌려서 억지로 알약을 넣으면, 삼키지 않고 입에 물고 있거나 뱉기 일쑤였다. 간호사들은 설득하거나 애원하거나 화를 내거나를 반복했다. 그러한 실랑이들이 내 귀에 시도 때도 없이 날아와 꽂히는 통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하지만 정작 불면은 큰 문제도 아니었다. 내가 입실하고 어느 순간부터 아주머니는 나를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나는 필연적으로 아주머니의 주의를 끄는 환자일 수밖에 없었다. 하루에 한 번은 신생아 중환자실의 아기와 영상통화를 하며 눈물을 쏟아내고, 무엇보다 그 병실에서 유일하게 스스로 거동이 가능한 환자였기 때문이다.
첫 번째 병상 할머니는 거동이 불가능한 상태였고 세 번째 병상 아주머니는 거동이 '허락되지 않는' 상태였다. 뇌수술을 받은 탓에 일어나거나 걸으면 수술 부위의 무언가 떨어질 수 있고, 그러면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라는 얘기를 얼핏 들었다. 가뜩이나 뇌수술 후유증으로 각종 이상증상에 시달리는 아주머니에게 그 사실은 분노유발의 충분한 이유가 되고도 남았다.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데 움직이지 말라니. 미칠 노릇이라는 건 이해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주머니는 미칠 노릇을 넘어 정말로 미치신 분이었다. 간호사를 괴롭히거나 자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 나를 우두커니 쳐다보는 순간이 잦았다. 특별히 말을 걸거나 하진 않았지만 문제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일 때였다. 아주머니는 화장실에 '걸어' 가거나 창문 앞에서 스트레칭 하는 나를 보고 나면 어김없이 탈출을 기도했다. 어지러이 엉킨 링거 줄이 몸에서 뽑혀 나가든 말든, 머리의 수술 부위에서 뭐가 떨어지든 말든 막무가내로 침대를 벗어나 기립을 시도했다. 기겁을 하며 달려온 간호사들과 실랑이를 벌이길 몇 번. 나는 자는 척했지만 사실은 도저히 잠들 수 없었던 어느 밤에 급기야 아주머니가 사지를 결박당했다.
그 날 밤은 간호사들이 모두 다른 병실 환자를 돌보느라 cctv를 지켜보는 사람이 없었고, 그래서 아주머니는 침상 탈출에 충분한 시간을 들일 수 있었다. 곧 간호사가 들어오면 n번째 탈출시도도 실패로 끝나겠지, 하며 잠자코 있던 내 예상과 달리 아주머니는 마침내 침대 탈출에 성공했다. 침대 옆에 우뚝 선 그녀는 조금 어지러운 듯 잠시 한숨을 쉬었다. 그 길로 당장 병실 밖으로 뛰쳐 나가려나 싶어 초조한 맘으로 바라보았으나, 그녀는 그저 어딘가를 응시하며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입실 후 처음으로 얼굴에 편안한 표정이 떠올랐다. 아, 저런 표정도 지으실 수 있구나. 하며 감탄 비슷한 걸 하려는 찰나 그제서야 간호사들이 들이닥쳤다. 더는 안 되겠다는 얘길 주고받더니 아주머니의 보호자인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사지 결박에 동의해 줄 것을 요구했다. 긴 통화가 끝나고 마침내 아주머니의 팔다리는 침대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응 그래, 묶어라 묶어." 어쩐지 평소와 다르게 체념한 듯 중얼거리던 아주머니가 잠들고 나서야 그날의 소동은 끝이 났다.
이곳에 내가 머무르게 된 이유와, 내가 한참 아기에게 수유를 해야하는 산모라는 사실과, 도통 잡히지 않는 고열과, 그리고 나보다 더한 고통의 늪에 빠져 있는 주변 환자들의 풍경들은 온전한 정신 상태를 유지하기 힘들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나 역시 마음껏 화를 표출하고 싶었지만 안쓰럽기 짝이 없는 간호사들을 보며 간신히 이성의 끈을 붙들고 있었다. 분노와 절망. 7일간 온전히 감내해야 하는 지옥같은 환경에서 그러한 감정들은 어쩌면 설명이 필요 없는 당연한 마음의 산물들이었다. 하지만 내 속을 들락날락 하는 감정 중에 하나 이해하기 힘든 게 있었는데, 바로 두려움이었다. 내 옆 침대의 하루 종일 기진맥진한 할머니를 볼 때도, 맞은편에서 나를 쳐다보며 탈출 기도를 일삼던 아주머니를 볼 때도 두려웠다. 그런데 왜 두려운지 스스로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고 해야할까. 물론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아니었지만, 나에게 해코지를 할지도 모른다는 이유의 두려움은 아니었다. 미친 아주머니는 나를 쳐다는 볼지언정 내가 아기와 영상통화 할 때만큼은 애틋한 미소를 건네기도 했으니까.
나는 도대체 뭐가 두려운 걸까. 이유는 있는 것 같은데 명확히 설명되지 않았다. 아주머니의 주의를 덜 끌기 위해 움직임을 줄이고 침대에 오도카니 앉아 나의 감정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유축하거나 누워있는 것 외엔 딱히 할 일이 없었기에 떠오르는 감정을 파고, 까뒤집고, 곱씹어볼 여유가 넘쳐났다. 그래서일까. 격리 4일째쯤, 나는 내 두려움의 정체를 흐릿하게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미친 아주머니에게도 가족은 있었다. 늦은 밤 전화로 사지 결박에 동의해 줄 것을 요구받던 남편이었다. 그래도 시간이 흐르며 아주머니의 상태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던 건지, 4일째쯤 되자 탈출 시도 횟수를 줄이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변화가 생기자 이제 내가 그녀를 힐끗거릴 차례. 여전히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 속에서도 저 아줌마가 오늘은 뭐 하시려나, 궁금해졌다.
스피커 폰으로 어딘가 전화를 건다. 몇 차례 신호음 끝에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새된 소리로 성질을 내던 아내와는 달리 매우 온화한 성정의 아저씨 목소리다. "OO아. 밥 잘 챙겨 먹고 있어?" 남편이 다정하게 부른 이름은 침대에 붙어있는 아주머니의 이름과 달랐는데, 나중에 통화 내용을 들어보니 손녀 이름으로 아주머니를 부른 것이었다. 나이 많은 고모들이 우리 엄마를 '윤미야' 하고 부르던 걸 생각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전화는 아주머니가 걸었는데 끊임없이 안부를 묻는 건 남편이었고, 그녀는 거의 대답하지 않았다. 잠자코 듣고만 있다가 가끔 '아 몰라' '시끄러' 하는 식의 불친절한 대답을 툭 던지는 식이었다. 그래도 아저씨는 익숙한 듯 참을성 있게 말을 걸었고, 침묵이 길어져도 전화를 먼저 끊진 않았다. 아주머니 역시 남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면서도 통화종료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그렇게 기이한 통화를 본의 아니게 엿듣고 있는데, 아저씨가 손녀 얘기를 꺼냈다.
"빨리 나아서 OO이 만나러 가야지."
그 순간 새삼스레 깨달은 건 두 사람이 각자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형태의 한 덩어리 라는 사실이었다. 아저씨의 다독이는 말에 아주머니의 마음이 흔들렸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엉뚱하게도 곁에서 통화를 엿듣고 있던 내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요, 아주머니. 가족 고생시키면 안 되죠. 딸도 손녀도 할머니 얼마나 보고싶겠어요. 얼른 쾌차하셔야죠.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한 오지랖을 마음속으로 부리는 동안, 나는 자연스럽게 내 가족을 생각하게 되었다. 집에서 코로나와 싸우는 중인 나의 여섯 살 아들과, 신생아실에 격리된 나의 둘째와, 자나깨나 딸 걱정 중인 나의 엄마와, 지금은 돌아가시고 없는 나의 아빠와, 내 고통을 함께 짊어져 주고 있는 나의 남편과, 나의, 나의...
머릿속에서 가족들의 얼굴을 배회하다 마침내 도착한 곳은 나 자신이었다. 그러자 며칠간 정체를 분간할 수 없었던 두려움의 이유가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오지 않은 나의 시간.
거동을 전혀 못 하는 상태로 온종일 주무시는 할머니도, 침상을 탈출하겠답시고 여러 사람 괴롭히는 아주머니도 그 언젠가의 내 모습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사람은 반드시 늙고, 반드시 무슨 병에든 걸리고, 그러나 무슨 병에 걸릴지는 아무도 모르고, 아마도 높은 확률로 병원에서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며, 그 모든 상황에서 나 또한 예외는 아닐지도 모른다. 시간이 갈수록 더 자주 그런 생각을 하는 나에게 곁에 누운 그녀들을 바라보는 건 마치 미래의 내 모습에 대한 나쁜 예시를 목격한 것과 다름없는 암울함이었다. 그들은 시간이라는 절대자가 제시하는 내 미래에 대한 레퍼런스 중에서도 끝끝내 외면하고 싶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대체로 내 인생의 과거와 현재는 행복에 가깝다고 평가하면서도, 나는 미래에 대해서만은 쉽게 낙관하는 법이 없었다. 미래에 대한 대비를 실행에 옮기며 사는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음까지 함부로 놓아버리면, 시간은 나의 안일함이 틀렸다는 걸 증명해주려 불행을 한아름 안고 내게 찾아올 것만 같았다. 격리 병동은 그런 나의 막연한 불안감을 더욱 극대화하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나는 언제 어떻게 아플까. 나의 몸은 어떤 애로사항을 겪을까. 그럴 때 나의 가족은 내 곁에 있어줄까. 내가 나를 제어할 수 없는 순간이 오면 나는 어떻게 해야 주변 사람들에게 최대한 덜 폐를 끼칠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죽어야 할까.
할머니와 아주머니는 나보다 하루 먼저 격리병동을 떠나 일반 병실로 옮기셨지만, 그들로부터 촉발된 내 두려움은 퇴원할 때까지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격리병동에서의 그 나날들 이후 지금까지도 '쇠퇴'에 관한 두려움은 내 아랫배에 자리잡은 제왕절개 흔적처럼 영구히 새겨진 것 같은 느낌이다.
‘현재를 살자.’ 30대까지 줄곧 떠올리며 살았던 허름하고도 유일한 인생 모토다. 인생은 언제나 오로지 현재만이 감당할 수 있는 실재이고, 그러므로 오지도 않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 당장 내게 주어진 시간에 충실하는 것이 그나마 인생을 덜 허무하게 소비하는 방법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럴 듯 하지만 뻔한 말. 그래도 내겐 믿고 나아가야 할 단 하나의 진리였다. 허나 날이 갈수록 삶의 엔딩 과정에 대한 두려움에 무겁게 짓눌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인생의 모토대로 살고 있진 못한 것 같다. 혹은 그런 방식으로 인생을 살 수 있는 에너지를 이미 많이 소진해버렸는지도. 이 두려움은 어떻게 자가치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극복은 요원하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한편으론 극복해선 안 될 두려움 같기도 하다. 나의 이런 감정은, 마냥 낙관할 수 만은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미래에 대한 일종의 마음 대비책 아닐까 싶어서. 이 두려움을 언제까지나 기억하며, 늘 돌다리를 두들겨보며 엉거주춤 앞으로 나아가는 심정으로 조심조심 더 나은 미래에 도착하기 위해 애쓰며 사는 수 밖에.
일반 병실로 옮겨갔던 할머니와 아주머니가 무사히 퇴원하셨기를. 그리하여 가족들과 웃으며 재회했기를. 먼 미래의 내가 병실이 아닌 곳에서 행복하길 바라는 이기적인 소망을, 조금은 이타적인 마음으로 치장하여 그 분들의 건강을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