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의 관계 정리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영원히 활활 타오르는 사랑은 정말 없는 것일까?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사랑 호르몬이라고 불리는 도파민과 엔도르핀은 18-30개월 정도 지나면 분비가 줄어든다고 한다. 즉, 불타는 사랑의 유효기간이 있다는 것. 호르몬의 영향으로 신진대사가 이뤄지는 나 역시 이 유통기한에서 예외는 아닌 듯하다. 그와 나, 더 이상 예전 같지 않다. 온종일 머릿속이 온통 그 생각뿐 일 때도 있었다. 틈만 나면 컴퓨터와 핸드폰을 켜서 함께 하는 시간을 붙잡고 싶었고, 없는 시간을 쪼개 만나고 또 만나려 노력했다. 시간과 정성을 들여 한 번이라도 그를 더 매만져주려 애썼고, 번듯해진 그의 모습에서 나의 행복을 찾았다. 그의 손을 붙잡고 있으면 그 자체만으로도 내가 더 괜찮은 사람, 더 나은 사람인 것 같은 기분에 마음이 일렁였다.
성은 지을 ‘작‘에 이름은 글월 ‘문‘. 글을 짓는다는 멋진 이름을 가진 ‘작문’, 그는 글쓰기라는 애칭도 있다. 함께하면 어떻게 흘러가는 가는 줄도 몰랐던 그와 시간이 요즘은 너무도 더디게 기어간다. 한 달에 한 번, 어쩌다 겨우 마주하는 것도 버겁게 느껴진다. 귀찮게 느껴질 때도 있고. 눈에서 멀어진 만큼 마음에서도 멀어졌으리라. 가끔 생각은 하지만 딱히 만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것도 아니고, 좋기는 하지만 타오르는 사랑은 느낄 수 없다. 뜨겁지도 그렇다고 차가워서 돌아서고 싶은 것도 아닌 그저 그런 미적지근한 상태가 그와 나 사이의 온도. 다시 덥혀야 할지, 아니면 식게 내버려 둬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이런 게 말로만 듣던 권태기인가 싶어 덜컥 겁이 난다. 변한 게 없는 그를 두고 이런 마음을 담고 있는 내가 나쁜 사람은 아닌지 죄책감도 든다.
한창 불안하고 힘들 때 작문 씨를 처음 만났다. 아이 둘을 낳고 직장을 그만두었다. 첫째를 낳고 힘겹게 워킹맘 생황을 했던지라, 둘째를 낳고 퇴사한 후 첫 2-3년은 마음이 홀가분했다. 하지만 복직이 생각만큼 수월하지 않았고 경력 단절이 길어지면서 불안함이 부풀어 올랐다. 아이들이 커서 손이 덜 가고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정말이지 인터넷에서 전업주부를 비하하는 단어인 ‘잉여인간’이 어쩌면 지금의 나를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울해졌다. 아이들을 통해 보람과 행복을 느꼈지만 이렇게 밥하고 빨래나 할 거면 뭣하러 힘들게 공부하고 비싼 등록금을 내며 대학을 다녔다 싶었다. 이렇게 효율성 떨어지는 존재로 도태될까 불안하고 또 우울했다.
그런 힘든 마음을 작문 씨에게 기대기 시작했다. 그에게 답답한 속내를 한 올 한 올 풀어내다 보면 내 삶이 그렇게 형편없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위로를 받았다. 한 가닥 두 가닥 엮어낸 마음이 한 편의 글로 완성이 되었을 땐, 다행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내 두뇌도 먹고 싸는 본능만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글이라는 것을 쓰고 있으니 금수보다는 낫구나 싶어서. 작문 씨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삶을 살던 나에게서 호모 사피엔스의 자질을 재발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나는 작문씨게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고마운 작문 씨와 함께한 시간이 여러 편의 글로 쌓이면서 그와의 사랑도 더욱 깊어갔다. 한창 뜨거운 시간을 보내던 작년 이맘때는 그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기도 했다. 박완서 작가님도 아이들을 다 키우고 마흔이 돼서야 집필활동을 시작하셨다고 하지 않았는가. 내 나이 마흔. 작문 씨와 함께라면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딱 좋은 나이가 아니겠느냐고 스스로를 독려했다.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고, 메모를 하고, 의견을 나누고, 고심에 고심을 거치고… 그렇게 글을 매만지면서 찌그러졌던 나 자신을 보듬고 다듬었다. 스스로를 ‘집에서 노는 백수 잉여인간‘으로 비하했던 나. 작문 씨를 만나고는 자존심도 꽤 많이 회복했다. 글을 쓰고 있으니 그래도 조금은 ‘우아하고 고상한 백수’가 아닐까 싶어서. 좋은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나 우리 관계를 더욱더 풍성하게 해 줄 수 있는 배움의 시간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독일에서 가져온 추억과 아픔을 꺼내 쓴 글이 차곡차곡 쌓였고, 글동무들의 출판 계약 소식을 들으며 나도 감히 꿈꿔보았다. 어쩌면 작문 씨와 나의 사랑이 출판이라는 열매를 맺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아직 만나지도 못한 2세를 상상하며 지치고 힘든 일상을 버텨내기도 했다.
그렇게 힘들 때 붙잡고 매달려서 마음의 안정을 찾게 해 주었던 고마운 작문 씨. 우리 사랑 영원할 거라고, 나는 평생 작문 씨를 가까이할 거라고 맹세했는데… 그 사랑이 식고 있다. 작년 말, 10년 경력 단절을 깨고 그토록 고대하던 이를 만나게 되었으니, 성은 되돌아갈 ‘복’, 이름은 직책 ‘직’. 그와의 만남은 심장이 터질 듯 강렬했다. 빨리 내 것으로 만들어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아 복직 씨에 대해 더 알고 싶고, 더 배우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놓치고 싶지 않은 이를 만나게 되니 자연스레 작문 씨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작문 씨를 만나 조용히 내 마음을 속삭이기보다는, 복직 씨에게 내 모든 걸 보여주며 적극적으로 어필하고 싶다. 함께 하는 시간과 쏟는 정성이 한쪽으로 기우는 것을 보면서 나도 마음이 편치는 않지만 어쩌겠는가. 작문 씨보다는 복직 씨랑 더 잘 통하는 것 같은데… 그래서일까? 요즘 꿈꾸는 내 미래에는 작문 씨 대신 복직 씨가 점점 더 많이 등장한다.
고생할 때 함께 있어준 연인을 출세하자마자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남자 주인공. 막장 드라마에 등장할 때마다 뭐 저런 파렴치 한 인간이 다 있냐고 욕을 바가지로 했다. 엄청난 성공을 한 것도 아니고, 작문씨를 내팽개친 것도 (아직은) 아니지만 작문씨과 복직씨 사이에서 저울질 하는 마음이 편치 않다. 작문씨는 과묵하지만 다정해서 좋고, 복직씨는 열정적이고 섹시해서 더 좋은 걸 나보고 어쩌란 말야… 복직씨와 잘 해보고 싶은 용기는 있어도 작문씨를 배신할 배짱이 없는 나. 아무래도 둘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이중생활을 하게 될 듯 싶다. 전처럼 자주 만나지 못하는 나를 영문도 모른 채 기다릴 착한 작문씨에게는 참 미안하다. 복직씨와 바람을 피우는 비겁한 짓을 하지만 함께 했던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작문씨와 자주 연락하면서 잘 지내도록 노력해야지. 누가 또 알아, 복직씨랑 싸우고 작문씨에게 마음이 되돌아올지.
어쨌든 ‘작문 씨 미안해, 사랑은 움직이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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