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마 상대가 되어 다행이다
우왕좌왕 대회날 아침까지도 결정하지 못했다.
어떤 게 더 좋을까? 어떤 게 더 나은 승률? 어떤 게 더 위력적인 드라이브? 결국 라켓 두 개 다 가방에 넣었다. 예선이 시작되고 먼저 심판을 보았다. 심판을 보면서도 정하지 못했다. 도박하고픈 마음. 평소 쓰지 않던 라켓을 골라 센세이션을 일으켜보자는 생각. 공이 더 좋아지겠지? 예선 첫 경기에서 검정 라켓을 들었다. 1세트가 시작되지 마자 후회했다. 그냥 평소 쓰던 라켓으로 할걸. 정말이지 힘들었다. 검정 라켓은 평소 잘 쓰지 않던 라켓이지만 얼마 전 딱 한번 시험 삼아 들었을 때 감이 좋았었다. 그러나 막상 대회날 친 감각은, 너무 잘 튕긴다는 거였다. 잘 튕기는 바람에 공을 잡고 칠 수가 없었다. 모든 공을 툭툭 치는 타법으로 버티니, 반드시 이겨야 하는 예선 첫 게임에서 진땀 승부를 펼쳤다. 겨우 3대 2 스코어로 승리하고 곧바로 라켓을 바꾸었다. 예선 두 번째 게임은 쉽게 3대 0으로 이겼다. 다시는 도박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본선 1회전.
상대는 작년에 3대 1로 패했던 금산 쪽 탁구장 젊은 김 선수. 그때 1세트 따낸 것도 운이 좋아 얻은 거지 본실력이 아니었다. 거의 압도당했던 기억이 전부다. 배정받은 테이블이 하필이면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목 모퉁이다. 바로 옆에서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곳. 걱정이 앞섰다. 지더라도 잘 져야 할 텐데... 저번처럼 3대 0으로 박살 나면 안 되는데... 하는 걱정. 어떻게든 한 세트라도 따내고 싶은데... 하는 염려.
우려한 대로 게임이 시작되고 첫 세트를 내줬다. 어찌어찌 2세트를 내리 이겨 2대 1로 앞섰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어차피 질 거지만 이만하면 되었다 하는 안도감. 2대 2가 되었다. 5세트에서 내가 10대 8로 앞서고 있었다. 그제야 설마 이거 이기는 거 아닌가 하는 의문이 모락모락 피기 시작했다. 이기면 어떻게 되는 거지 하는 설렘. 나 정말 이기면 대박이라는 기대. 설마 내 서브차롄데 한 점을 못 딸까 하는 자만. 아무렇게나 해도 이기겠지 하는 착각. 나는 평범한 서브를 넣었고 평범히 두 점을 헌납했다. 미쳤다. 이걸 듀스로 잡히다니. 갑자기 쫓기는 신세. 다시 한점 뺏기고 11대 10이 되었다. 이거 설마 지는 거 아냐? 하는데 스코어 판을 보니 12대 10이 아닌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졌구나. 다 이긴 겜을 내줬구나 하는 아쉬움. 그래도 막상막하로 버텼으니 잘했다는 결과론. 뒤섞이는 감정에 서둘로 악수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이대로 곧장 돗자리로 가기에는 너무 아쉬운 스코어. 그러나 어차피 결과는 났다. 시간은 지나버렸다. 새겨진 현실은 과거로 변했고 되돌릴 수가 없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돗자리로 돌아와 구장 사람들에게 아깝게 졌다는 점을 어필하는데... 말하면서도 아쉬움이 가시지 않았다.
단체전 첫 상대가 통영이라니.
통영 팀은 3부 단체전(7,8부) 때부터 지겹도록 만났다. 요즘은 2부 단체전(4,5,6부)에서 만난다. 오늘 사천대회는 3인 단체전이다. 통영 팀은 전부 백발에 고령이다. 그만큼 구력 탁구인들이다. 구력이 깊어 서브 하나도 평범한 게 없다. 다행이라면 우리 팀에 성준 형이 있다는 것이다. 성준 형은 우리 탁구장 에이스 중의 에이스다. 2년 동안 8부에서 4부까지 승급했다. 모두 개인전 우승으로만 이룬 성과다. 성준 형은 예상대로 1번으로 나가 3대 0 완승을 거뒀다. 태준이가 2번으로 나가 3대 0으로 패했다. 3번인 나는 통영 팀에서 가장 고령인 김 선수와 만났다. 김 선수는 2년 전 거창 대회에서 만나 3대 0으로 정말이지 상대도 안 되는 내용과 스코어로 패했었다. 그때 그분의 커트랠리와 부드러운 루프 드라이브에 손 한 번 써보지 못한 쓰라림에 기분이 무척이나 안 좋았던 기억이 있다. 심지어 서브도 못 받아 몇 점 따보지도 못했다. 그 대회에서 통영 팀 김 선수는 개인전 단체전을 휩쓸었고 승급했다. 같은 팀 2번으로 나온 다른 김 선수와 함께 개인전 공동 우승도 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났다. 뒤에서 성준 형이 보고 있다. 오래간만에 성준 형과 팀을 이뤄 출전했는데 못난 모습을 보이면 실망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들었다. 게임이 시작되고 역시나 서브부터 어려웠다. 퉁~ 퉁~ 공이 바운드되어 온다. 커트처럼 보이는데 막상 대보면 무회전 너클. 공이 붕 떠오르자 그대로 스매싱. 밖으로 튕겨나간 공을 주워다 주는 성준 형의 표정이 어두웠다. 그렇게 1세트를 내줬다. 성준 형이나 태준의 얼굴을 보니 기대감이라곤 1도 없었다. 무표정으로 내가 지는 걸 지켜보고만 있는 입장. 성준 형이 벤치를 봐주었다. 물러서지 말고 포핸드로 잡아라. 2세트가 시작되고 백 쪽으로 많이 휘어지는 공까지 나는 억지로 돌며 포핸드로 잡으려 애썼다. 김 선수의 이쪽저쪽 코스 빼는 랠리에 미치도록 뛰어다녔다. 실력이 아니라 막일하는 탁구로 겨우 1세트를 따냈다. 3세트를 내주고 4세트를 잡았다. 5세트가 되었다. 정신 차리니 10대 6으로 앞서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공을 주으며 돌아서서 휴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겼구나. 드디어 극복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준 형에게도 면이 섰구나 하는 마음에 기쁘기까지 했다. 거기다 내 서브 차례. 끝내야지 하는 결심. 그러나 의도한 시스템 플레이가 모두 실패하고 스코어는 10대 8. 설마 아까 개인전처럼 잡히는 건 아니겠지 하는 불안. 스멀스멀 드는 상상. 여기서 만일 역전패당한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평판이 내리 꽂히겠지? 다시는 성준 형과 한 팀이 될 수 없겠지? 이거 5세트 트라우마 생기는 거 아닐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김 선수의 서브를 5세트 말미가 되었는데도 자신 있게 받을 수가 없다. 반회전 서브를 무의식에 커트로 대다가 오른쪽으로 오버 아웃이 되었다. 10대 9. 상대의 커트서브를 회전인 줄 알고 쇼트로 대다가 네트에 걸렸다. 10대 10. 미친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맞은편 통영 팀 사람들 얼굴이 즐거운 표정으로 변했다. 믿기지 않는 상황. 차라리 처음부터 지던가. 이때 심판 보던 태준이가 나중에 해준 말. 듀스 됐을 때 지는 줄 알았어요. 성준 형도 말했다. 동점 됐을 때 끝났다고 생각했다. 시공간이 멈춘 순간. 나는 질 수 없었다. 1점씩 주고받다가 상대의 공이 오버아웃 될 때, 나는 어퍼컷 세리모니와 함께 "빠샤~" "아자~"를 외쳤다. 아마 그 순간 삼천포 체육관에 있던 모두가 그 기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기합과 함께 상대에게 꾸벅 인사하고 태준, 성준 형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거기서 멈춰야 했는데 너무 신난 나머지 옆에 있던 통영팀 사람들에게도 다가가 한 명 한 명 하이파이브를 했다. 통영 팀 사람들은 실망한 얼굴로 뭐야? 이놈? 하면서도 손뼉을 쳐주었다. 몇 년간 지겹게도 만난 통영 팀 아닌가.
비록 2회전에서 1, 2번이 내리 패하는 바람에 3번인 나는 게임도 못해보고 끝났지만 괜찮았다. 예전에 상대도 되지 않던 상대에게, 상대가 되는 수준은 되었구나 하는 만족감에 기분이 좋았다.
아직 대회는 끝나지 않았다. 이번주에 창녕대회가 있고 2주 뒤에는 고성대회가 있는데 아내에게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주말마다 참 너무 하네"라는 말을 엊그제 들었을 때부터 고개 숙인 남자가 되었다.
이번주말에는 아내가 먹고 싶다는 조개찜을 꼭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