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천, 놓아주기 아쉬운 순간
몇 년 전 한번 경험했기에 자신감이 충만했지만 경험의 기억이 부스러기처럼 완전히 사라진 상태란 것을 운전대 앞에 앉고서야 알게 되었다. 과연 이 차를 몰고 일본 시내를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핸들 옆을 건드렸는데 난데없이 와이퍼가 움직여서 이게 뭐야? 뭘 어떻게 해야 와이퍼가 멈출까 하는 당황스러움. 한참이 지나서야 이쪽이 방향 깜빡이고 저쪽이 와이퍼임을 인지하게 되었다. 어떻든 짐을 싣고 출발. 렌터카 직원은 불안한 내 눈빛을 냉정히 무시하고 차량 인계만 하고서 돌아서버렸다. 하긴 그런 눈빛, 한둘이 아니었겠지.
설설 기어서
세차게 달리는 도로에 진입하고부터 부디 내 앞에서 신호가 바뀌지 않기를 바랐다. 무조건 앞차를 따라가기 작전. 꽁무니를 놓치지 않아야 해. 불안함은 전파되기 마련. 옆자리에 앉은 아내도 좌불안석이다. 나는 연신 중얼거렸다. 왼쪽으로 가야 해. 잠시라도 망각하면 차를 우측에 맞추는 본능 때문이다. 거기다 구글 네비는 그리 친절하지 않았다. 여러 갈래 길을 그저 우회전, 혹은 살짝 우회전하세요 라고 대체 이쪽 우회전인지 저쪽 우회전인지 따져 묻고 싶건만 물을 여지나 상대가 없었다. 사이드미러 뒤에서는 끊임없이 차가 따라왔다. 내가 따라가야 편하지 따라오는 차는 부담이었다. 혹시나 따라오는 차를 막지나 않을까 불안한 마음. 흡사 내가 엉뚱하게 운전하지나 않는지 감시하러 나온 경찰 같기도 했다. 뒤차를 의식하는 가운데, 우회전해야 하는데 초록불이 터졌다. 정확히 초록불만 켜졌다. 오른쪽 화살표가 없는데 우회전해도 되나 싶어 눈치를 보는데 뒤차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면 가면 안 되는 건가 싶어 멈췄다. 이윽고 빨간불이 되고 잠시간 기다리니 다시금 같은 초록불이 켜졌다. 그제야 화살표 신호가 없다는 걸 알았고 움찔움찔 우회전하니 뒤차도 따라 우회전했다. 아니 그러면 애당초 클락션을 울려주었으면 "왜 안 가냐?"라는 말로 알아듣고 우회전했을 터인데 정말이지 매너 운전의 나라가 아닐 수 없다. 종합해 보면 신호등 아래 화살표 신호등이 따로 없을 때는 비보호 우회전이 가능한 것 같다.
결국 고속도로를 내려와 어버버 하다 우회전 한번 잘못하여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가 삼십 분을 허비했다.
처음 간 곳은 다케오 로몬 온천이다.
로몬에 주차하고 주변을 돌다가 적당한 곳에 들러 첫 끼를 때웠다. 먹고 녹나무를 보러 갔다. 다케오 신사 옆에 있던 나무. 무려 삼천 년의 수령. 나무는 대나무 밭에 둘러싸여 있었다. 날씨 탓인가 주변 이끼마저 녹색 바탕으로 신비로워 보였다. 잎사귀가 파릇파릇하니 바람에 하늘거렸다. 나무를 가만히 보니 가지마다 신성한 산신령님이 여럿 계실 것만 같았다. 두 손 모아 인사하고 돌아오는 길 커다란 귤 한 봉지를 샀다. 만원쯤 됐는데 거의 오 킬로 정도 되는 양이었다. 이 귤 봉지는 5일 내내 우리를 따라다녔다.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아 결국 마지막 호텔에 두고 올 수밖에 없었다. 크기도 제각각 모양도 예쁘지 않지만 맛은 최고였다.
로몬 목욕탕에 들어갔다.
그저 그런 우리네 동네목욕탕 정도의 크기인데 천장이 높은 게 뻥 뚫려있는 구조다. 큰 나무기둥이 얼기설기 높다랗게 지붕을 이고 있는데 천장에 바람이 들어오는 형태다. 찬 바람이 상체를 감싸고 하체는 탕에 들어가 있는 시간. 사람들은 저마다 머리에 흰 수건을 얹었다. 나는 흰 수건이 젖을세라 샤워기 있는 쪽에 걸쳐 두고 몸만 탕에 담갔는데 사람들 눈이 나만 보고 있는 거 같았다. 내가 일본사람처럼 생기지 않아서인가. 그게 표가 나는가. 아니면 일본인치고는 되게 이국적으로 생겨서 그런가. 나중에 알고 보니 탕에 들어가 있을 때 혼이 머리 위로 달아나지 않게 흰 수건을 정수리에 얹어두는 전통이 있어서라고 한다. 누가 그리 했는데 다들 따라 하게 되어 일명 얼굴수건이라고도 했다. 으레 큰 수건 작은 수건 이렇게 두장을 준다. 수건 활용법을 모르는 나는 사람들 눈빛을 피하느라 내내 천장만 바라봤다. 뻥 뚫린 천장의 커다란 통나무 사이로 괴괴한 바람이 넘나들었다. 바람은 내 목덜미와 가슴팍을 휘감아 이국의 한기를 새겨 주었다. 그럼에 내 몸은 아래 따뜻한 물에 들어가 있으니 나는 보호받고 있구나, 안심해도 되겠구나 하는 마음을 상기하여 만들어 버티는 형국이다. 한기와 온천의 만남. 공기와 물의 접촉. 몸이 걸쳐져 두 개체를 연결한다. 나는 그 매개의 역을 즐기다 큰 수건을 찾아 닦고 나왔다.
다시 운전대를 잡고 나가사키 하우스텐보스 숙소로 갔다.
호텔의 대 목욕장이 참 마음에 들었다.
깨끗한 시설에 야외 온천탕까지 있었다. 늦은 밤 바깥 탕에 들어가 앉아있으니 아까 불었던 괴괴한 바람이 어느새 따라와 머리 위로 불었다. 올려다보니 아카시아를 닮은 이파리가 바람에 나팔나팔 흔들렸다. 겨울인데 설마 아카시아? 내려다보니 탕 바로 옆에 뿌리가 박힌 것이 어쩌면 온천의 뜨거운 기운에 겨울에도 봄 같은 기운이 전파되는 건가 싶었다. 탕 주변에 조경수가 몇 그루 있는데 그들은 선택된 나무들이다. 까만 밤하늘에 초록 이파리들이 바들바들 떨렸다. 나무도 온천욕을 즐기는 사람처럼 아래는 따뜻하고 위는 춥다. 그 적절한 조화가 이 순간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 같다. 뭔가 아리아리한 순간의 느낌이, 아름다운 건지 아니면 감기 걸리기 딱 좋은 상태인 건지 아리송하지만 일정 부분은 인간이 느끼는 감미로움이란 영역을 쿡쿡 찌르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래서 찰나의 자극에 달콤함을 한치라도 더 느끼려고 올려다보고 두리번거리는 거다. 나는 가만히 수면을 보며 빠져들었다. 목욕은 좋은 거구나. 겨울만이라도 목욕을 다녀볼까. 가까운 목욕탕이 어디 있지? 저녁에 시간이 날까? 무슨 요일 언제 어떻게 가지? 가만 이 소중한 순간에 무슨 망상에 빠진 거야?
가끔, 아주 가끔 가는 게 좋다.
맛있는 음식도 자주 먹으면 식상해지듯, 이런 온천도 가끔 아주 드물게 오니 감동하지 않나 싶다. 겨울에 어쩌다 간간이 오는 것. 한 해만 지나도 경험의 기억이 부스러기처럼 사라져 올 때마다 이렇듯 감탄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