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목이 빠지게 기다렸건만,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세계 최고 대학이라는 곳은 역시 콧대가 높았다. 혹시나 살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보스턴 여행을 미뤄오고 있었는데, 더 이상 미룰 이유가 없어졌다. 곧바로 보스턴행 버스를 예매했다.
뉴욕에서 보스턴까지 가는 가장 간편한 방법은 버스이다. 뉴욕 Penn Station에 있는 Megabus 정류장에서 보스턴까지는 약 4시간 30분 정도가 걸린다. Megabus는 예약하는 시기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 통상은 편도에 약 30불 정도지만, 일찍 예약할수록, 비수기일수록 더 싼 가격에 예매할 수 있다. 나는 금요일에 아침 일찍 출발해 토요일 저녁 늦게 돌아오는 티켓을 샀기에 편도 약 10불 정도의 싼 가격에 예매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뉴욕에서 다른 도시로 가고자 한다면 Greyhound(Megabus에 비해 조금 더 비싸지만 시간 등이 더 정확하다고 한다), Gotobus(중국 버스인데 Megabus를 아주 싼 가격에 사지 못한 이상 보통은 Megabus보다 저렴할 것이다) 같은 다양한 버스들이 있어 원하는 시간에 편하게 이동할 수 있다.
보스턴에 대해 아는 것은 하버드와 MIT가 있는 학교라는 것뿐이었다. 예전에 MBC에서 방송했던, 당시 하버드 재학 중이던 전 미스코리아 금나나 씨를 다룬 다큐를 본 적이 있다. 경북대 의대생, 미스코리아 진이라는 성취를 내려놓고 하버드로 훌쩍 유학을 온 금나나 씨의 열정이 아름답다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히 세계 최고라던 대학의 캠퍼스가 어찌나 예뻐보이던지, 꿈을 이야기하던 금나나 씨는 어찌나 빛이 나 보이던지. 나도 언젠가는 그녀와 같은 위치에 서서 그녀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들러서 먹는다던 초콜릿 가게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을 했었다. 그 애증의 대학교에서 날 받아주지 않는 바람에 그럴 수 없게 됐지만.
이미 보스턴에 다녀온 친구들은 꼭 해산물을 먹으라고 했다. 특히 lobster(외래어 표기로는 "로브스터"라고 한다. 흔히 말하는 랍스타, 랍스터는 모두 틀린 표현이라고. 이번에 처음 알았지면 여전히 "로브스터"란 표준어는 생소하기만 하다.)가 유명하다고. 어렸을 때부터 게, 새우 등 온갖 갑각류를 사랑하던 내게 보스턴에 가서 하고 싶은 것은 딱 두 가지였다. 1. 하버드 대학교 탐방, 2. 로브스터 먹기.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던 차에 보스턴 미술관이 눈에 들어왔다. 정식 명칭은 Museum of Fine Arts. 포탈 검색에 의하면 파리의 루브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뉴욕의 메트로폴리탄과 함께 세계 4대 미술관 중 하나로 평가받는 곳이라고 했다. 게다가 미국의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이 많은 곳이라니. 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세 가지를 하는 것을 큰 일정으로 잡고 보스턴을 향해 길을 나섰다.
메가버스는 예정보다 30분을 더 넘긴 오후 2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보스턴에 도착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우선 요기를 하러 퀸시마켓으로 향했다. 로브스터를 즐기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lobster roll, 즉 마요네즈에 버무린 로브스터를 따뜻한 빵 속에 넣어 먹는 샌드위치인 듯했다. 퀸시마켓은 보스턴의 큰 시장으로, 이 곳에서 로브스터 롤과 clam chowder soup를 먹는 것이 대다수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인 듯하여 나도 따라 해 보기로 했다.
Quincy Market은 시장임에도(?) 쾌적하고 깨끗했다. 물론 보스턴이라는 도시 자체가 뉴욕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전반적으로 깨끗하긴 했지만. 퀸시마켓은 역시 관광객으로 붐볐다. 특히 거의 모든 관광객이 수프와 로브스터 롤 중 하나는 먹고 있는 듯했다. 아주 특별한 맛은 아니었지만, 따뜻하고 기름진 빵 속에 통통한 로브스터 살이 잘 어울렸다. 내가 만일 보스턴에 살았더라면 일주일에 한 번은 로브스터 롤로 끼니를 때웠을 것 같다.
든든한 점심을 먹은 후 드디어 하버드 대학교로 향했다. 보스턴은 대중교통이 잘 정비되어 있다. 지하철이 주요 관광지에 다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버스와 지하철을 24시간 동안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One day pass가 단돈 12불밖에 하지 않으므로,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여행하는 것이 여러모로 편리할 것이다. 나도 one day pass를 손에 들고, red line을 타고 하버드 역으로 향했다. 이곳은 지하철마저 뉴욕에 비해 너무 깨끗해서 황송할 정도였다. 노선이 몇 개 없고 열차가 작아서 관리하기 쉽기 때문일까.
지하철 역에서 나오면 바로 Harvard Yard를 만날 수 있다. 발을 만지면 하버드에 다시 올 수 있게 된다는 전설(?)로 유명한 존 하버드 동상이 바로 이 야드에 있다. 이 전설 때문에 동상의 발 부분은 유독 노랗게 변해 있는데, 하버드 학부를 졸업한 친구가 하버드 학생들은 주로 오줌을 누는 곳으로 활용한다며(?) 미리 만지지 말라고 충고를 해 주기도 했다.
학교가 워낙 넓어서 전부 둘러보기 힘들다면 투어에 참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호스텔에서 제공하는 각종 무료 투어들도 있고, 하버드 학생이 직접 안내하는 유료 투어도 신청할 수 있으므로 입학을 꿈꾸는 청소년들이라면 한 번쯤 들어볼만 할 것이다. 나는 그저 하버드의 분위기만 느끼고 가려던 것이었기에 굳이 투어를 신청하지 않았지만, 도처에 있는 건물들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어서 아쉽기도 했다.
잔디밭이 드리워진 잘 꾸며진 교정은 내가 꿈꾸던 '미국의 대학' 그 자체였다. 학생들이 잔디밭에서 족구와 비슷해 보이는 운동을 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이렇게 조용하고 평화로워 보이는데, 건물 안에서는 치열한 경쟁 속에 공부하고 있을 세계 최고의 학생들을 생각하니 기분이 묘해졌다. 하버드는 무려 1636년에 개교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이다.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순위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워너비 스쿨이 되었다. 미국의 대통령 중 8명이 하버드를 졸업했고, 노벨상 수상자가 47명에 이른다고 하니 이 학교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알 만하다. 특히 하버드 로스쿨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유명인사들을 배출했다. 현 미국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와, 현 연방대법원장인 존 로버츠 주니어가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했다. 즉, 현재 미국을 이끄는 행정과 사법의 수장이 모두 하버드 로스쿨 출신인 것이다.
최근 재미있는 기사를 읽었다. 하버드 로스쿨의 공식 문장이 노예제도와 관련이 있다는 지적이 일어 80년간 써운 공식 문장을 폐기한다는 것이었다. Veritas(진리)라는 문구 밑에 그려진 세 다발의 밀 문장은 Isaac Royall Jr 가문의 것으로, 그가 기부로 하버드 로스쿨 설립에 기여하자 이를 기리기 위해 그려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재산의 대부분이 노예제도를 통해 형성된 것이라며 교수와 학생, 동문들이 지난 3월 이사회에 문장 폐기를 요구하였다. 실천하지 않는 지성은 의미가 없다는 의미를 던지는 것일까. 과연 어떤 학생들이 이 안에 모여있는 것인지 들어가 보고 싶었으나 로스쿨의 높은 진입장벽은 나를 허락하지 않았다.
하버드를 한 바퀴 둘러본 후, 아쉬움이 남아 기념품을 사기로 했다. Coop이라는 협동조합에 가면 책 외에도 후드 티, 컵, 열쇠고리 등 각종 기념품을 살 수 있다. 문양 대신 H라는 글자가 있는 티셔츠를 골랐다. 다른 학교에 놀러 갔을 때에는 아무 기념품도 사지 않았었는데, 이 곳에서는 왠지 사야만 할 것 같았다. 책에서 그 이름을 접하고 설렜던 어린 시절, 어드미션을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지난 날들, 불합격 통보를 받았던 때의 실망감을, 티셔츠를 바라볼 때마다 인생의 소중한 한 페이지로 기억해두는 것쯤은 하버드도 내게 허락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