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희, 송창식 : 안개
사실, 저는 박찬욱이라는 감독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박쥐, 설국열차, 아가씨··· 누구나 봤을 법한 몇 개의 유명한 영화를 봤을 뿐이니까요. 그 영화들은 하나같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만, 영화를 보고 난 뒤에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어요. 주인공의 성장 스토리나 가슴이 뜨거워지는 음악 영화를 좋아하는 취향 때문인지, 뭔가 마무리되지 않은 듯한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거든요.
깐느 박이 되어 돌아온 그의 새 영화 <헤어질 결심>은 이야기의 출발점이 무척 흥미로웠어요. 감독이 (가장 좋아하는 가요라는) 정훈희의 ‘안개’를 한 번, 알고리즘의 영향으로 송창식 버전의 ‘안개’를 또 한 번, 연달아 듣고는 ‘안개 낀 풍경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싶다, 전반부에는 정훈희, 후반부에는 송창식의 목소리가 나오는 영화를 해야겠다’ 생각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영화에는 안개가 낀 지역이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고 정훈희의 ‘안개’도 여러 번 나옵니다. 정훈희, 송창식의 버전은 따로 쓰이지 않고, 함께 부른 안개를 새로 녹음해서 엔딩에 쓰였지만요.
그런데 이 듀엣곡을 만들어 낸 스토리가 또 한 편의 영화 같아요. 나이도 먹고, 성대 수술도 해서 이제 목소리가 안 나온다고 녹음을 거절한 송창식 씨를 설득하려고 박찬욱 감독은 무작정 미사리 라이브 카페에 갔대요. 송창식 씨가 주말마다 노래하는 무대에 찾아가서 ‘안개'를 신청곡으로 적어 낸 거죠. 신청곡을 받아 든 송창식 씨는 “이게 내가 만든 곡이 아니라 가사가 기억이 다 날지 모르겠는데, 한번 해봅시다” 하고 노래를 시작했고, 아니나 다를까 1절 끝나고 가사가 막혀버렸답니다.
그때, 객석에서 누군가 2절 첫 소절을 불러주기 시작했어요. 박찬욱 감독과 같이 간 정훈희 씨였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송창식 씨는 결국 노래를 끝까지 불렀대요. 하지만 결코 녹음하지 않겠다는 고집을 꺾지는 않았죠. 계속 거절하는 송창식 씨에게 정훈희 씨가 결정적 한마디를 날립니다. “형, 어린 감독이 뭐 좀 해보겠다는데, 도와줍시다 좀!”
뭐 좀 해보려는 어린 감독이라니. 어려서부터 우상으로 여겨온 분들을 한데 모셔서 녹음하는 현장에서 박찬욱 감독이 얼마나 감격했을지 상상이 되나요?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가사를 곱씹으면서 이 노래를 듣는 시간까지가 이 영화의 진정한 상영 시간’이라는 말에 저는 <헤어질 결심>을 볼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이 음악을 제대로 듣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마침내. 박찬욱 감독을 좋아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말았습니다. 그는 ‘행님아’ 시절부터 김신영 씨의 팬이었다고, 스우파를 보고는 모니카 씨의 팬이 됐다고도 밝혔는데요. 이쯤 되면 헤어질 결심은 거의 팬심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아닌가 싶어요. 그 모든 것을 버무려 <헤어질 결심>을 완성했을 때 얼마나 뿌듯했을까요.
박찬욱 감독이 이런 말을 했다죠. “나는 관객이 영화라는 열차를 탔을 때 종착역이 어디인 줄 모르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저 역시 이번엔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내 예상이 어떻게 빗나갈지를 내심 기대했던 것 같아요. 이것이 박찬욱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좋아하는 이유,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안 좋아하는 이유가 될지도 모르겠지만요. 주관을 가지고 고집스럽게 일하는 사람에게만 할 수 있는 기대는 분명 계속될 것 같아요. 앞으로도 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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