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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만세 Dec 30. 2022

선수와 백수 사이

백현진 : 빛

얼마 전 매우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어요. 뮤지션 백현진 씨가 배우로도 활동하고 있다는 것. <해피니스>라는 드라마에서 비인간의 끝판왕으로 입에서 욕이 쏟아져 나오게 했던 사이코패스 의사가 바로 그 백현진 씨라는 것. 맞아요, 이게 다 제가 백현진 씨의 노래하는 목소리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알고리즘을 타고 그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펄떡이는 날것의 보컬에 놀라 ‘뭐지??? 이 사람 뭐지?’하고 이름만 확인했었거든요. 이런 식의 얼굴 없는 가수가 저에겐 참 많은 듯합니다만··· 아무튼, 그 가수가 이 배우라는 사실이 저를 혼란에 빠뜨렸어요.


말이 쉽지,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이 있잖아요. 이를테면 예술가로서 무리 없이 살아가는 일 같은 것 말이에요. 저 역시 막연하게 예술가의 삶을 꿈꾸던 때가 있었는데요. 알고 보니 백현진 씨야말로 말로만 듣던 종합 예술인이더라고요. 백현진 씨가 부업인 배우로 얼굴을 알리는 바람에 오히려 ‘이 사람이 가수였다고?’ 하시는 분 계신다면, 이번 기회에 이 곡을 한 번 들어보세요.



찰랑이는 기타에 피아노가 얹어지고 색소폰이 슬그머니 들어와 조명을 밝히고. 현악기, 건반악기, 관악기, 백현진 씨의 목소리도 그냥 하나의 악기로 담담하게 하나둘 쌓여 어우러지다가 힘 빼고 박수로 마무리··· 무심한 듯 시크하다는 게 이런 걸까요. ‘마음을 다해 대충대충’을 음악으로 표현하면 바로 이렇지 않으려나요.


흥분한 나머지 백현진 씨 인터뷰까지 찾아 읽다가 ‘외부의 주문과 컨펌 없이도 자기 삶을 이어가는 게 예술가의 기본값’이라는 정의에 다시 한번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래서 컨펌받는 일은 이제 안 한다고? 20년간 성과가 없는 음악을 지속했다고? 근데 창작의 고통도 없다고? 이렇게 살아갈 수 있다고? 그게 가능하다고···?

저 영상에서도 보면 백현진 씨는 처음부터 끝까지 눈을 감고 노래하는데요. 언젠가부터 차마 눈뜨고 노래할 수 없어서 눈을 감고 노래하다 보니 습관이 됐대요. (노래하다 보면 그나마 한 명 있던 관객도 나갔다고···) 음악적 성과는 전무하다지만 부업이 잘되어 다행입니다. 이 곡을 들어보면 음악을 계속해 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에요.


저도 백수 시절 스스로를 인디 아티스트라고 소개하곤 했는데요. 백현진 씨의 인터뷰를 읽으며 마구 가슴이 뛰는 걸 보니 저는 여전히 성과와 관계없는 일들을 믿고 있나 봅니다. 그래 맞아, 나는 이런 사람이었지. 영감을 쥐어짜고 타인을 괴롭히고 온갖 진상 다 떨면서 나온 디자인 말고. 즐겁게 일해서 나온 결과물이니 편하게 막 가져다 쓰시라고 말할 수 있는 선수, 내가 좋아하는 일을 나 좋을대로 계속해나가는 백수 사이에 저도 있고 싶네요.





흠, 이거 흥미로운데?라고 느낄 법한 콘텐츠를 격주로 전달하는 흠터레터의 <완전진짜너무진심> 코너를 브런치에도 옮깁니다. 흠터레터를 구독하시면 다른 꼭지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함께 만나볼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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