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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만세 Dec 31. 2022

나의 사랑하는 생활

스미노 하야토 : New Birth 

춘천에서 올해의 마지막 글을 씁니다. 한 해를 돌아보고 잘 마무리하고 싶어서 가까운 곳으로 떠나왔거든요. 창밖으로는 춘천 시청이 내려다보여요. 시청을 향해 걸어오는 사람들도 보이네요. 서울을 벗어났을 뿐인데 시간이 조금은 천천히 흐르는 기분입니다. 숙소의 벽면에는 이런 문구가 붙어있어요.


바쁨을 여기까지 끌고 온 저에게 꼭 필요했던 문장


큰 계획 없이 주민처럼 스적스적 다니다가 동네 서점에서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 <나의 사랑하는 생활>을 읽었습니다. 시시콜콜한 내용이 나열된 것이 어찌나 공감이 되던지. 저도 한번 적어보고 싶어졌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언제 행복을 느끼는지.

나는 일찍 눈이 떠졌는데 급하게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아침을 좋아합니다. 일찍 눈이 떠진다는 것이 핵심인데 웬만하면 그런 일이 잘  없기 때문입니다.나는 에어팟을 지그시 눌러 노이즈 캔슬링으로 전환하는 순간을 좋아합니다. 사람이 많은 버스 안에 샌드위치로 끼어있다고 해도 그 순간 나만의 공간이 생겨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이 밀려옵니다. 내 생활을 바꾼 단 하나의 물건을 꼽으라면 에어팟이 강력한 1위 후보일 거예요. 나는 내가 바보 같은 소리를 해서 누구나 바보 같은 말을 해도 되는 분위기가 되는 것을 좋아합니다. 바보 같은 소리를 생각 없이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건 생각보다 까다롭거든요. 나는 꼬질한 상태에서 하는 빅샤워를 좋아합니다. 머리를 감고, 얼굴도 귀 뒤쪽까지 좀 더 박박 문지르고, 온몸에 비누칠하고, 손톱 발톱까지 깎는 것이 나의 빅샤워입니다. (극대화를 위해 주말 내내 꼬질한 상태로 있기도 합니다.) 나는 해 질 녘에 노을을 보며 배캠을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라디오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는 순간을 특히 좋아합니다. 같은 노래여도 라디오로 들으면 10배쯤 더 좋답니다. 나는 배캠이 끝나는 저녁 8시쯤 해가 지는 계절을 사랑합니다. 나는 하늘 보기를 좋아하고 햇빛과 노을을 좋아합니다. 그것들을 누릴 수 있는 맑은 날에는 집 안에 있는 게 너무 아깝습니다. 큰 창이 있는 집에 살게 되면, 그래서 집 안에서도 날씨를 누릴 수 있게 되면, 이런 생각을 안 하게 되려나 궁금합니다. 나는 자전거 타기를 좋아합니다. 내 의지로 달릴 수 있고, 멈출 수 있고,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무엇보다 탐험하는 기분이라 좋습니다. 최근에 전기 자전거를 탔는데, 이제 그냥 자전거는 못 타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걷는 것도 좋아합니다. 목적지로 걸어가는 것도 좋아하지만 가는 길에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를 더 좋아합니다. 기대했던 목적지보다 가는 과정에 우연히 만난 순간들이 더 좋았던 적이 많기 때문입니다···

적다 보니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데요. 하긴, 춘천에 와서도 좋아하는 순간을 벌써 몇 번이나 만났으니까요.



아무리 바빠도 올해가 끝나기 전 가만히 앉아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적어 보면 어떨까요. 하나하나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고, 이런 순간을 더 많이 만들어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됩니다. 배경음악으로는 스미노 하야토의 <New Birth>가 좋겠어요. 피아노 연주라고는 무지렁이인 제가 최근 가장 많은 에너지를 얻은 곡인데요. 예상치 못한 일들로 퇴근이 늦어질 때면 집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널브러진 채로 마지막 힘을 짜내 이 곡을 귀에 넣곤 했어요. 그럼 신기하게도 그날 있었던 모든 어려움과 괴로움이 씻겨 내려갔습니다. 조금 과장하면 제목처럼 새로 태어나는 기분마저 들었어요. 영혼의 샤워랄까요.


아무튼 저는 이번에도, 어떻게든 된다는 마음으로 새사람 되기를 준비해 보겠습니다. 좋아하는 마음을 생활의 기준으로 삼아 우리 모두 원하는 방향으로 한발 더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숨 고르기, 그리고 잘 바쁘기.





흠, 이거 흥미로운데?라고 느낄 법한 콘텐츠를 격주로 전달하는 흠터레터의 <완전진짜너무진심> 코너를 브런치에도 옮깁니다. 흠터레터를 구독하시면 다른 꼭지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함께 만나볼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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