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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만세 Mar 14. 2023

강백호를 키운 좋은 어른에 대하여

더 퍼스트 슬램덩크

초등학교 6학년 때, 이사와 함께 전학을 가게 되어 꽤나 우울했던 시절. 친구 하나 없는 낯선 동네에서 저는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책 대여점에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한두 권씩 하이틴 소설책 같은 걸 빌려보는 데 재미를 붙였던 것 같아요. 어느 날은 책을 고르다가 그 자리에서 단숨에 한 권을 다 읽어버렸는데, 그 책이 바로 <슬램덩크>였습니다.


그날부로 저는 매일매일 슬램덩크를 보러 대여점에 갔습니다. 롤러스케이트를 신은 채 쪼그리고 앉아 2시간씩 만화책을 보고 왔죠. 누군가 다음 권을 빌려 가서 허탕치고 돌아온 날도 있고요. ‘한 권만 더 보고 싶지만 오늘은 이만 돌아가자’ 마음먹고 대여점 문을 밀고 나오던 길도, 그날 본 장면들을 곱씹으며 속력을 높였던 것도 어렴풋이 기억납니다. 

그때는 책방에서 책을 보면 공짜인 줄 알았어요. 긴 탁자에 만화책을 쌓아두고 보는 언니, 오빠들이 항상 있었으니까요. 카운터의 아르바이트생도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매일 오는 초등학생에게 쏟을 정신은 없었나 봅니다. 어쩌면 맘씨 좋은 사장님이 못 본 척 눈감아주었을지도 모르죠. 부끄럽지만 저는 그렇게, 슬램덩크 전권을 다 공짜로 봤답니다.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

고등학생이 되기도 전에 봤던 슬램덩크를 어른의 나이가 되어 다시 보니 다르게 보였어요. 예전엔 시크하고 멋있다고 생각했던 캐릭터가 사회성 제로로 보이기도 하고, 외골수 문제아인 이들을 움직이게 하는 안 선생님이나 한나 누나 같은 캐릭터가 진짜 어른이다 싶기도 했거든요. 특히 드리블 연습을 왜 해야 하는지조차 모르던 강백호를 이끌어준 동료, 선배, 어른들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 사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가요.


처음 슬램덩크를 봤을 때, 저는 강백호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백호가 농구를 만나 달라진 것처럼 나도 집념을 발휘할 뭔가를 만나 강해지고 싶었던 것 같아요. 돌아보니 내 곁에도 안 선생님 같은 어른이 있었습니다. 불합리한 상황에 화가 난 나에게 ‘정의는 승리할 거라고, 그걸 믿기 때문에 희망을 품고 사는 거라고, 새로운 환경이 낯설겠지만 용기 있게 부딪히면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거라고, 사람의 노력 없이 주문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고, 너를 만나 기쁘고 너의 성장을 바라볼 수 있어 행복하다’고··· 괴로움 가득한 6학년 초딩의 일기에 진심을 담은 코멘트를 남겨주신 담임 선생님만 봐도 그렇거든요.


이제야 알겠습니다. 많은 다정한 어른들이 어린 나를 보듬어 성장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는 것을요. 큰 부상을 입은 강백호가 앞으로 농구를 계속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농구를 만나 달라진 백호는 어떤 상황에서든 포기하지 않고 헤쳐 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 농구로 세계 제패는 못 하더라도 누군가의 성장을 기다려줄 줄 아는 괜찮은 어른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성장이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하고 이제 와서야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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