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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히르 Apr 19. 2017

#13, 헨로고로가시보다 아찔한 우라토대교를 건너다

나, 다시 돌아갈래! (for #29~#33)

2015년 10월 26일 월요일 맑음     


- 9km - 29 国分寺(Kokubunji) - 7km - 30 善楽寺(Zenrakuji) -7.4km - 31 竹林寺(Chikurinji) - 6km - 32 禅師峰寺(Zenjibuji) - 7.5km - 33 雪蹊寺(Sekkeiji)



오늘 좀 강행군 일정이다.

평이 좋기로 유명한 국민숙소토사(国民宿舎土佐)를 내일자로 예약해 두었으니 내일 36번 쇼류지까지 마쳐야 하므로 오늘은 33번 셋케이지까지는 걸어두어야 하는 데 거리만도 37킬로에 달하고, 5개의 절을 들러야 하니 좀 무리긴 하다.


6시에 서둘러 아침식사를 한다. 역시나 아키타현의 남자는 어제의 과음 때문인지 식당에 보이질 않고, 사이타마현의 젊은 부부와 식사를 하는 데 오늘 일정이 36번 셋케이지까지라고 하니 둘다 놀라는 눈치다.
요며칠간 계속 35킬로 이상을 걷고 있다는 데에는 혀를 내두른다.

가장 먼저 숙소를 나서는데 주인장과 상냥한 사이타마현의 아내가 보이지 않도록 손을 흔들어준다. 이 길을 다시 걷게 된다면 또 한번 묵어보고 싶은 숙소 리스트에 추가시킨다. 친구같은 그녀와도 종종 만났으면 싶은데 하루에 25킬로 이내로 걷는다니 또 만날 일이 없지 싶다.




29번 고쿠분지(国分寺)까지는 약 9킬로, 내륙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고난시(香南市)에서 가미시(香美市)를 거쳐 난코쿠시(南国市)까지 작은 소도시의 마을과 들녘을 걷는다.

추수를 끝낸 논 이외에 작은 대나무잎처럼 생긴 작물이 주로 눈에 띄는 데 죽순도 아닐 것이고, 도대체 알 수가 없는 작물인데 시간과 카메라가 허락한다면 제대로 담아보고 싶기도 하지만 그 어느 것도 허락되는 게 없는 데다 갈 길은 머니 걸음을 재촉하는 수 밖에 없다.

9킬로를 두 시간만에 주파하고 고쿠분지에 닿는다. 고쿠분지(国分寺)는 이름 그대로 국가공인사찰로 시코쿠의 현이 각각의 쿠니(国)로 존재하던 시절부터 한 나라에 하나씩 총 4개가 세워졌다. 아와국阿波国(지금의 도쿠시마현)의 15번, 토사국土佐国(지금의 고치현) 의 29번, 이요국伊予国(지금의 에히메현)의 59번, 사누키국讃岐国(지금의 카가와현)의 80번이 그것이다.

29번의 고쿠분지에서는 코보대사가 42살에 호시마츠리(星祭り) 의식을 수행했다고 전해진다. 호시마츠리는 7월7일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칠석날에 행해지는 일종의 액막이 의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고쿠분지에서 서양인 오헨로상을 만난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와서 8주 계획으로 일본을 여행중인데 4주 동안은 시코쿠 88 영장 사찰 중 51번까지 걸은 후에 나머지 4주간은 도쿄에서 친구와 지낼거라고 한다. 이번이 3번째 오헨로미치란다. 처음에는 그저 새로운 경험이었고, 두번째는 코보대사를 알게 됐었고, 이번에는 자신을 찾아가는 길이라고...

노랑머리 서양 사람이 오헨로미치를 걸으며 자신을 찾아가고 있다니 순례에는 동양, 서양의 구분도 없나보다. 




30번 젠라쿠지(善楽寺)까지는 약 7킬로, 서쪽으로 한가로운 시골 들녁을 걷는다. 쉬어가고 싶은 나무 그늘도 만나는 반면에 전쟁법안 반대 포스터도 눈에 띈다. Stop! 戰爭法案 약자를 전장에 두지마! 를 외치는 정당이 일본공산당이라는 게 이색적이다. 

全国革新懇이라고 하는 평화.민주.혁신의 일본을 지향하는 전국 모임에서도 평화헌법을 지키려는 노력이 행해지고 있는 듯하다. 참으로 바람직한 움직임인데 그 세력은 미미한 것 같아서 안타까울 뿐이다.

젠라쿠지는 大同年間(806~809)에 토사이치신궁의 별당사로서 건립되었으나, 메이지의 폐불훼석(당시 막 성립되었던 메이지 정부가 불교 사원과 승려들이 받고 있던 특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사원, 불경, 불상 등을 훼손한 사건)에 의해 토사신사가 되어 일시 폐사되기에 이르렀다. 그후 본존의 아미타여래를 한발 앞서 부흥시킨 안라쿠지(安楽寺)가 30번의 찰소로 인정되어 있다가 젠라쿠지가 다시 일어나면서 30번 찰소는 2개가 된다. 그 후 코보대사 개창(開創) 1150주년 기념 대법회를 계기로 협정을 맺어 젠라쿠지는 30번 찰소가 되고, 안라쿠지는 그의 오쿠노인으로 새로 정해졌다고 한다. 




31번 치쿠린지(竹林寺)까지는 7.4킬로, 일정이 빡센지라 부지런히 걷는다. 아직 11시지만 앞으로도 21킬로 가까이 일정이 남았으므로 주변을 돌아볼 겨를조차 없다. 어제부터 눈에 거슬리는 자위대모집현판은 무시하고, 목이 말라 맥주를 그야말로 노도고시(のどごし_맥주 이름 한번 잘 지었다)하고 또다시 걷는다. 

만만하게 생각했던 치쿠린지에 가까와서는 살짝 등산로라 힘들게 오르는데, 뜬금없는 현립공원, 식물원이 나타나서 방향감각을 잃게 한다. 심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있다면 한번쯤 돌아보고 싶은, 주위 전체가 공원에 식물원이나 오늘은 형편이 형편인지라 짜증을 더할 뿐이다. 구글맵도 헤매고 나도 헤매고 1시가 되어서야 치쿠린지 산문을 들어선다. 


치쿠린지는 요사코이마츠리(고치현에서 매년 8월 9일부터 12일까지 4일간 열리는 군무를 중심으로 한 축제)의 무대인 동시에 학승, 명승이 모이는 '남해제일도장'으로 학문사원으로서도 알려져 있다. 가마쿠라에서 남북조시대의 저명한 임제종의 학승, 무소국사가 산기슭에 규고안(吸江庵)을 세워서 수행, 2년여 동안 후진 양성에 노력했다고도 하고, 입구에서 짜증을 내며 지나온 식물원이 고치가 낳은 세계적인 식물학자 마키노 도미타로 박사의 마키노식물원, 토사의 신앙과 문화의 중심지로서 토사 최고의 사찰이라고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천천히 돌아볼 여유는 없다. 




32번 젠지부지(禅師峰寺)까지 다시 6킬로다. 2시반을 목표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올랐던 반대 방향에서 내려와 시모다강을 건넌 후에 둑방길을 걷는다. 247번 도로와 만나는 곳에서 우회전, 247번 도로를 따라 걸은 후에 좌회전, 우회전, 좌회전해서 왼쪽에 호수를 끼고 걷다보면 젠지부지가 지척이다. 


태평양의 파도가 높은 토사만(土佐湾)에 가까이 위치한 젠지부지는 해상의 안전을 기원해서 건립된 사찰로 바다 사나이들은 '선혼의 관음'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어부에 한하지 않고, 번정시대에는 산킨교다이(参勤交代:江戸幕府가 번을 다스리고 중앙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다이묘(大名:넓은 영지를 가진 무사)들을 교대로 일정한 기간씩 江戸에 머무르게 한 제도) 등으로 우라토만(浦戸湾)을 출항하는 역대의 번주들은 모두 젠지부지에 들러 항해의 무사안전을 빌었다고 한다.




7.5킬로를 가는 33번 셋케이지(雪蹊寺)까지의 노선은 둘로 나누어진다. 거대한 표주박 모양의 우라토만의 입구를 가로질러 건너야 하는 데 県営渡船種崎待合所(현영 도선 타네자키 대합실)에서 무료로 운행하는 배를 타는 방법과 우라토대교를 걸어서 건너는 방법이 그것이다.


젠지부지에서 우라토만까지 가는 데만도 한시간이 넘는 거리인지라 타네자키 대합실에 도착하면 4시쯤 될텐데 배시간은 4시반이다. 배를 타고 건너서는 납경소가 문을 닫는 5시까지 셋케이지에 닿지 못한다는 결론에 도달한지라 우라토대교를 건너기로 한다. 

'걸어서 두시간 안에 가보지 머' 그랬는 데 아~~ 우라토대교는 그냥 만만한 다리가 아니었다. 청담대교, 잠실대교처럼 진입로가 원형 회전을 하지는 않지만 완만하게 휘어지면서 점점 고도를 높여가는 다리의 북쪽 진입로에 오르면서부터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한다. 인도는 살짝 턱이 져 있지만 바로 옆을 쌩쌩 달리는 자동차도 공포의 대상이다.

진입로에 오르자마자 오른쪽에 오헨로휴게소가 있는 데 거기 앉아서 출발하기를 주저하는 오헨로상도 보인다. 나도 쉬었다가 그 분 손이라도 잡고 건너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대한민국의 딸이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지라 씩씩하게 지나치지만 이미 가슴은 콩닥콩닥 심장이 콩알만해져서 팔딱거리는 데 전념하고 있다.

철망으로 가드가 쭉 이어져 있고, 설사 바다로 떨어진다해도 너끈히 헤엄쳐 건널 수 있는 수영실력도 위안이 되지 않는다. 버젓이 우라토대교를 건너는 노선으로 그려진 오헨로미치 지도책도 원망스럽고 내 발등을 내가 찍어 이 길에 서 있는 나 자신이 싫어질 정도!

1킬로가 넘는 고공 우라토대교를 가까스로 건너서 셋케이지까지 가까스로 5시 전에 닿는다. 

우선 납경을 받아놓고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는 경내에 홀로 앉아 잠시 일어날 줄을 모른다. 

'이게 머야, 이게 나를 찾는 방법이라구, 나를 더 작아지게 하는 건 아니구?'



사실, 우라토대교를 건너면 지척에, 관광지로도 유명한 가츠라하마에 일본 근대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인물 사카모토 료마의 기념관이 있다. 고치현 토사번의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대정봉환운동의 선구에 서고, 막부타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일본이 메이지유신과 근대국가로 나아가는 토대를 마련한 인물, 33세의 나이에 막부에 의해 암살되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쓰, 오다 노부나가에 버금가게 역사적인 추앙을 받는 사카모토 료마의 기념관에도 들러볼 일이나, 일본의 근대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면 직간접적으론 사후일지라도 일제 강점기와 무관하지 않은 인물이라 치부하며 일부러 가보고 싶지 않다는 구실을 가지 못하는 핑겟거리로 삼는다.


예약해 둔 숙소 에이코료칸으로 가는 길에 둘이 만나 같이 귀가하는 꼬맹이들을 만난다. 남매일까, 사귀는 사일까. 저런 꼬맹이들도 짝을 이뤄 다니는 데 지금 이순간 내가 혼자라는 게 진저리나게 싫다.

숙소마저 지금까지 중 최악으로 너무 오래되고 낡아서 냄새도 나고, 들어가고 싶지 않은 욕실에 저녁으로 나온 식사도 취향이 아닌데다 근처의 공사장에서 일하는 인부들인지 예닐곱명의 남자들이 단체로 옆 테이블에서 왁자지껄하게 떠들면서 식사를 하는지라 위압감마저 든다. 

너무 힘든 하루다.

접고 돌아가고 싶지 않게 내일 위안거리가 있어얄텐데......




에이코료칸(2식 포함) 6500엔

음료 285엔

헨로용품 550엔

납경(29~33번) 1500엔


총 8835엔

이동거리 37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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