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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히르 May 18. 2017

#16, 시코쿠의 가을이 무르익다

들녘의 수확처럼 풍요로워지고 넉넉해지고 싶다 (for #37)

2015년 10월 29일 목요일 맑음


민슈쿠아와(民宿あわ) - 27km - 37 岩本寺(Iwamotoji) - 무라노이에(民宿村の家)



민슈쿠아와(民宿あわ)는 어제 저녁도 별로더니 아침도 역시나 별로다.

세상에나 이 정도면 별로인 정도가 넘어서 편의점 삼각김밥이 훨 낫겠다. 슬라이스햄 두장에 채썬 양배추 한 젓가락, 싫어라하는 날달걀 하나, 마늘종 볶음, 어묵 두개, 김 한장, 미소된장국엔 꼴랑 두부 몇 알과 쪽파 다진 것만 둥둥 떠다닌다. 그렇다고 남길 건 아니지만 너무하다 싶다.


오늘은 이틀만에 36번 쇼류지에서 37번 이와모토지(岩本寺)까지 가는 날인데 고치현에서는 드물게도 바닷가 한번 지나지 않고 서남쪽으로 내륙을 가로지르는, 중간에 얕은 산도 두어번 넘어야 하는 길이다.

안그래도 산길이라 걱정했었는데 일행이 될 사코상이 딱 나타난거다. 역시나 카미사마는 항상 내편이라는 생각이 틀리지 않다.


7시에 숙소를 출발해서 잠시 뒤에는 야트막한 등산로다. 일본의 산은 아무리 야트막해도 많이 우거지기 때문에 혼자였다면 무서웠을텐데 사코상이 옆에서 끊임없이 재잘거리고, 뒤뚱거리고, 미끄러지면서 몸개그까지 보여주는 덕에 지루하지 않다. 게다가 얕은 산을 넘고 나선 내가 있어서 든든했다고 말해 주는 사코상이 나 역시나 무척 고맙다.


산을 넘어 조금만 더 가면 JR도산선(土讃線 : 가가와현의 타도츠역(多度津駅)에서 고치현의 구보카와역(窪川駅)을 잇는 시코쿠 남북 내륙 산간 노선)의 도사구레역(土佐久礼駅)이다. 걸음이 쳐지는 사코상한테 천천히 오라하고 잰 걸음으로 근처의 우체국에 들러 삼각대와 렌즈 하나를 대일사로 보낸다. 


다시 헨로미치로 나갔는데 사코상이 보이질 않는다. 앞서 갔으면 쭉 뻗은 도로라 눈에 띄어야 하는데 안 보이길래 되돌아 가보니 편의점 앞에서 오헨로상이랑 수다삼매경에 빠져있다가 나의 찡그린 얼굴을 보고는 꽁무니를 빼며 줄행랑을 치느라 바쁘다.

같이 있던 분도 헨로미치에서 간혹 만났던 초로의 오지상 아루키헨로다. 보아하니 헨로상이 안계셨다면 전봇대 하고라도 수다를 떨었을 사코상이다.

대책없는 이분을 채근해서 다시 오헨로미치로, 두번째 등산로로 접어든다. 접어들자마자 가파른 계단이 끝이 안보이게 이어진다. 숨이 턱턱 막히는 와중에도 가고시마에서 온 이 아줌마, 이 계단이 권사마, 지우히메의 그 천국의 계단 같다나 뭐라나 하면서 빵 터지게 만든다.


사코상과 함께여서 재미있게 오전에 두개의 산을 넘는다. 

등산로를 내려오면 간간이 마을이 보이고 들에서 경작하는 사람들이 있다. 궁금해했던 그 작물의 수확이 한창이기에 사코상한테 물어보니 생강이란다. 아~~ 대나무 이파리에 주렁주렁 매달린 건 정말 생강이다. 시골 출신인 내게도 너무 생소하게 매치가 안되는 생강의 잎과 뿌리열매에 허를 찔린 듯 신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란 걸 실감나게 하는 튼실한 생강열매로 인해 흐뭇해진다. 어디서든 가을은 풍요롭다. 이 가을처럼 내맘도 풍요롭고 너그러워졌으면 싶다. 우선은 욕심부리지 않고 내가 가진 작은 것에 감사하는 걸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이후로는 쭉 56번도로나 그 이면도로를 따라가는 길이다. 때마침 나타나 준 오헨로휴게소에서 간식과 음료를 먹으면서 잠시 쉬어간다. 혼자서는 한가롭게 휴식을 취할 마음의 여유도 없는데 사코상이 편안해서인지 휴식도 꿀맛이다. 사코상과 수다를 떨었던 그 오지상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이 걷기도 하고, 같이 쉬기도 한다. 한동안 안보였던 기타야마상, 고치현 초반부에서 자주 만났던 그 분도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이 길에서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우리들은 불가에서 말하는 그 몇겁의 인연을 쌓았던 걸까. 이 길에서 만나는 모든 순례자들에게 점점 측은지심을 가지게 된다.




산을 두개 넘기는 했어도 오늘 일정이 그리 긴 거리가 아닌지라 4시에 37번 이와모토지(岩本寺)에 도착한다.

이와모토지는 본당의 천정화가 유명하다. 본당의 천정화라면 불교색이 짙은 그림을 연상하기 쉽지만 1978년에 전국 공모전을 거쳐 선발된 575장의 그림은 동,식물 그림, 아름다운 풍경그림에서 인간 만다라까지 참으로 형형색색의 다양한 그림들의 복합전시장이다. 하다못해 마를린먼로의 그림까지 있는 걸 보니 실소가 절로 나온다.







이와모토지 슈쿠보를 예약한 사코상과는 내일 아침 7시에 만나서 같이 출발하기로 하고 절을 나서는 데 고맙게도 사코상이 배웅까지 해준다. 이와모토지 앞의 작은 다리를 건너니 안파는 게 없을 것 같은 잡화점도 보인다. 왼쪽으로 꺾어서 초등학교를 지나 마트로 향한다.

오늘은 간만에 숙소를 스도마리로 예약했으니 끼니를 챙겨야 할 터인데 다행히도 근처에 대형 마트가 있다. 저녁시간이라 세일도 한창이다. 반값 세일 도시락은 내일 아침으로 예비하고, 저녁은 치맥에 라면으로, 칼로리바 등 며칠 먹을 간식까지 푸짐하게 준비한다. 어제의 민슈쿠아와의 부실했던 두끼 식사를 보상받으려는 듯이.


무라노이에는 그래도 어제의 민슈쿠아와보다는 훨씬 정갈하다. 오늘 예약 손님도 나 혼자뿐이어서 주인할머니는 저녁을 준비하기가 귀찮으셨는지 스도마리만 가능하다 했는데 귤이랑 바나나랑 과자까지 챙겨주신다.

씻으려고 보니 하쿠의의 한쪽 끈이 달랑달랑 끊어질 듯 해서 주인 할머니께 바늘과 실을 빌린다. 그런데 헐~ 아무리해도 바늘귀를 못찾겠는거다. 한 10분을 씨름한 끝에 결국 할머니께로 다시 SOS를 청하는데 체면이 말이 아니다. 젊은 것이 8~90은 되셨을 할머니께 바늘귀를 꿰어 달라는 형국이라니... 할머니는 그 바늘귀 꿰는 도구라도 쓰셨는지 실을 꿰어서 힘겹게 2층으로 올려다까지 주시니 또 민망하다. 


우여곡절 끝에 하쿠의도 기워서 빨고, 간만의 치맥도 맛나고, 내일도 사코상과 7시에 만나기로 했으니 마음 편하게 잠자리에 든다. 




무라노이에(스도마리) 3500엔

음료 160엔

마트(저녁,아침,간식) 1693엔

우체국택배 1270엔

납경(37번) 300엔


총 6923엔

이동거리 27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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