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요 Mar 17. 2016

파리에서 온 리지스

Regis from Paris

나의 태국어 수업 클래스메이트인 리지스는 파리에서 왔다.


그는 팔에 우리나라 문신 토시 단골 문양의 문신을 하고, 종아리에도 문신으로 띠를 두르고 금목걸이를 한 조금 무서워보이는 미남 아저씨다. 아니지, 아저씨라고 하기엔 그가 서른세살이고 내가 스물여섯이니까 오빠네... 리지스 오빠... 나에게 난데없이 윙크를 하여 당황시킨 바 있다.


아무튼 리지스가 어느 날 수업에서 음식 관련 단어들을 배우던 날, 자기가 아는 게살 볶음밥 잘하는 집이 있는데 70바트 밖에 안한다고 해서 모두를 흥분시켰고, 나는 당장 수업이 끝나자마자 게살 볶음밥을 찾아나섰는데 거기 리지스가 떡하니 앉아있었다.




수업 때 나누는 초급 대화 말고는 딱히 대화를 해보지도 않았으므로, 우리는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물어보게 되었다. 리지스는 벌써 경력 16년차의 요리사. 셰프, 그러니까 주방의 병장같은 존재다. 삼십대 초반에 벌써! 그는 고등학교를 가지 않고 바로 16살때부터 주방에서 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러다가 너의 인생이 망할 것이라고 예언을 해댔다는데 지금은 내가 그들을 비웃어주고 있다고 신나게 얘기하는 얼굴이 빛나보였다.


그렇지만 쉬운 길은 아니었다고 한다. 당시 셰프가 사소한 실수를 한 리지스의 머리통에 냄비를 날리는 바람에 눈썹이 찢어진 흉터가 아직도 남아있고, 그 양반을 줄곧 싫어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고급 레스토랑에 들어갔을 때 아름답고 향긋한 면들만 보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요리는 사실 폭력과 욕설이 흘러넘치는 주방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 뭐야 물에게 욕을 하면 물 결정이 일그러진다는 주장이 너무나 무색해지는 말이다.


어쨌든 그 모든 걸 참고 견딘 덕분에 그는 이제 셰프가 되었고, 특히 파리에서 7-8년을 일한 경력은 세계의 모든 레스토랑에서 슈퍼패스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래서 그는 스위스에서도 부르고, 프랑스에서도 부르고, 스페인에서도 부른다. 연봉은 당연히 부르는게 값. 그리고 유럽의 대부분의 주방에는 프랑스인들이 많아서 불어만 써도 전혀 문제없이 모든 소통이 가능하다고 한다. 프랑스인 요리사는 그러니까 한국인 태권도 사범같은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의 문화 자본이 있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말, 고리타분해서 싫어하지만 사실은 정말로 그런건지도 모르겠다.




치앙마이에서 셰프 리지스의 하루는 다음과 같다.  9시에 일어난다. 시장에 가서 야채들을 장 봐온다. 그리고 그걸 요리하는게 아니라 깎는다!! 야채를 꽃모양이나 뭐 그런걸로 화려하게 깎는 걸 예전에 태국에서 배웠다고 한다. 그래서 매일같이 그걸 연습하고 있다고. 깎은 야채들을 어떻게 하냐고 물어봤더니 버린다고 해서, 자리깔고 내다팔라고 했더니 기분좋게 크게 웃어주었다. 야채를 깎고나서는 샤워를 하고 태국어 수업에 온다. 수업이 끝나면 식당에 와서 밥 먹고 그날 배운 단어들을 복습하고, 헬스장에 가서 2시간 운동을 한다..! 그래서 볼 때마다 자리에서 잘 못 일어나고, 걷는 것도 엉성했다. 수수께끼가 풀림! 씻고 나와서 집에 가서 또 한 번 씻고 잔다고 한다. 진짜 많이 씻는다고 하니까 하루에 다섯번 정도 샤워하는 것 같다고.ㅋㅋㅋ 그래서 그는 히피가 정말 싫단다. 사람은 청결해야되는데 왜 맨발로 다니고 씻지도 않는지 모르겠다고. 반평생을 요리사로 일한 사람의 위생관념인 것 같다. 씻는 것을 싫어하는 나는 매우 뜨끔하였지만 그냥 동의해버렸다.


리지스의 청결은 외적인 부분 뿐만이 아닌데, 일과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는 규칙적인 생활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는 특히 수많은 서양인들이 태국에 와서 태국인 여자를 사서 데리고 다니는게 너무 싫다고 했다. 그래서 자기가 있는 호스텔은 그런 여자들이 오면 쫓아내는 곳이라서 마음에 들었다고. 그런 환경을 견딜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런 그가 태국 땅에 와서 태국어를 공부하는 이유는 여기에 위스키 바를 차리고 싶어서라고 한다. 비즈니스 목적으로 태국어를 배우는 사람이라니, 뭔가 있어 보여. 이전 직장의 보스와 손잡고 위스키와 맛있는 요리를 파는 체인을 만들고 싶다고 한다. 태국 사람들은 위스키를 낮에 한 병씩 깔 정도로 정말 좋아하지만 맛있는 위스키를 파는 곳이 없다고 파리에서 온 요리 장인이 말했으니까 진짜 그럴 것이다. 사업 아이템을 생각하는 기획력과 그걸 실행할 수 있는 수완과 자본력.. 안타깝게도 우리 모두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살아가므로 상상을 현실로 치환하려면 돈이 든다. 나의 수많은 상상들도 그러하듯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자꾸 종업원이 와서 모어 비어?라며 맥주를 권하는 바람에 대낮부터 얼떨결에 세 병을 마신 우리들. 그래, 왠지 취기가 오르고 실없이 웃어댔다. 더 이상은 상술에 넘어가지 말자며 일어났고, 내일 수업에서 보자고 인사하며 헤어졌다. 그리고 그 주를 마지막으로 그는 몇일 째 수업에 안나오고 있다.... 다시 보게 되면 깎은 야채도 보여달라고 하고, 태국에서 할 만한 다른 식당 아이디어가 있는지도 물어보고 싶었는데 너무나 아쉬운 것. 다양한 국적으로 모여서 조금 비정상회담같은 우리 수업의 프랑스 및 유럽 대표를 모두가 그리워하고 있다.




그러니까 나도 결국 돈을 벌어야하겠지만 나의 가치관과 나에 취향에 조금이라도 더 근접한 곳에서 일하기 위해 계속 헤매고 있다. 언젠가 일의 지리함을 견딜수 있는 일을 찾기를. 열 여섯이라는 어린 나이에 빠르고 단호한 판단으로 그것을 찾아낸 리지스의 똑똑함을 닮을 수 있기를!

매거진의 이전글 뉴욕에서 온 블레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