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의 믿음, 세계관, 생각들

내 안에 있는 이야기와 생각들 끄집어내기

by San Baek 백산

오늘 아침에 오래 알던 지인이 새로 팟캐스트를 한다고 해서 (고민수의 Go On 팟캐스트) 어렵게 시간을 잡아서 인터뷰를 했다. 시작할 때는 눈도 잘 안 떠지고 몸도 천근만근이었는데, 하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에너지가 나왔다. 말하다가 감정이입이 돼서 깜짝깜짝 놀랄 때도 있었다.


이야기란 게 참 신기하다. 우리 안에 있는 이야기와 생각들이 세상밖으로 나올 때 그전엔 없었던 무언가가 새롭게 만들어지는걸 (Unlock) 경험한다. 그걸 통해 우리는 나 자신과 또 타인과 연결된다. 내가 이야기와 생각의 연결을 그다지도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 들이다. 아무래도 조만간 나도 뭔가 해봐야겠다. 아래 오늘의 대화내용을 나눈다.



Q. 나의 믿음에 대해. 신앙에 대해


1. 내게 믿음은 소망이다. 이 삶 너머에 더 아름답고 더 순수하며 더 근원적인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소망. 그걸 지금의 내 삶에 끌어당기는 게 믿음이다.


2. 내가 믿음을 가지기까지 크게 두 가지 단계가 있었다. 첫 번째는 내면의 치유/정화, 두 번째는 그 깨끗해진 백지의 도화지 위에 무언가 써보면서 시도해 보기. 첫 번째 단계 없이 두 번째 단계는 어렵다. 나의 삶의 근간이 되는 믿음을 가지려면 먼저 할 것은 자기 성찰, 내가 가진 상처, 불만, 후회 등을 돌아보고 어루만지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3. 믿음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면 답이 없다. 난 이렇게 생각하고 접근한다 - 한번 믿어보는 것. 한번 속아(?) 보는 것이라고. 한번 해보는 것이다. 그랬을 때 더 확인되고 보이고 하는 게 있을 거다. 그러면서 한 발자국씩 하면 되지 않을까. 그 한 발자국을 내딛기까지 난 삼십 년이 걸렸다.


Q. 치유와 정화의 과정을 조금더 알려달라.


1. 앞만 보고 달릴때는 치유와 정화가 있을수 없다. 성찰을 위해선 쉼이 필요하다. 한국에선 늘 바빴다. 늘 목말랐다. 쉰다는것, 성찰한다는건 사치로 여겨졌다. 미국에 와서 MBA 2년의 과정을 하면서 난 난생처음 제대로 쉬면서 나를 돌아볼수 있었다.


2. 나의 상처를 돌아보고 보듬을수 있는게 필요하다. 처음엔 상처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런데 MBA과정에 친구들이 먼저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나누는 문화가 있었다. 그게 나로 하여금 나의 상처와 아픔, 불만과 응어리들을 생각하게 만들어줬다.


3. 내가 유독 민감했던 부분, 내가 이상하게 행동했던 부분, 이런데에 실마리가 있을수 있다. 난 이상하리만큼 공짜에 집착하는 이상한 설명할수 없는 습관이 있었다. 백화점 시식대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알고보니 나에겐 돈에 대한 상처와 아픔이 있다는것을 나중에 알게됐다. 또 난 조금이라도 "화"를 내는 사람을 보면 그렇게 이해하기 어렵고 싫었고 그런 감정을 마주하는게 어려웠다. 이 또한 어린시절에 이런 감정에 매우 놀라고 다쳤던 부분이 있던 것을 알게됐다. 핵심 키워드는 “주관적” 과 “자유”이다. 객관적으로 어떤 환경을 겪었는지가 중요한게 아니라 지극히 주관적으로 그 환경과 경험이 내게 상처, 아픔, 충격 등을 남겨서 내가 어떤 부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거, 그걸 깨닫는게 회복의 시작이다.


4. 나의 스토리는 이렇다. 난 겉으론 매우 멀쩡했고 스스로도 매우 멀쩡한 사람인줄 알았지만 사실 몇가지 아픔과 응어리가 있었다. 하나는 한번도 외국생활을 해보지 못했다는것. 또 하나는 IMF이후 주위에 비해 재정적으로 여유롭지 않다고 느껴서 많은걸 혼자 해결하며 살아왔다는것. 그래서 이런걸 가진 친구들을 보면 부러웠다. 미국에서 유복하게 자라서 좋은 커리어를 가진 친구를 보면 나도 저런 환경이었으면 얼마든지 더 많은걸 이룰수 있지 않았을까 속으로 생각했다. MBA 때 만난 상당수 친구들이 그래서 부러웠고 나도 이들을 쫓아가려면 더 열심히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들의 삶을 알게되면서 나는 겪지 않았던 수많은 아픔과 상처들을 이들도 갖고 있다는걸 알게됐다. 서로의 아픔을 나누는 과정속에서 나도 나의 아픔을 알수 있게 되고 그걸로부터 자유로워질수 있었다.


Q. 왜 기독교인가. 크리스천으로서 당신이 믿는 믿음은 무엇인가

1. 내가 믿는 건 독립적으로 온전하지만 서로 사랑하며 의존하고 있는 신 (성부, 성자, 성령으로 알려짐), 그 신의 형상으로 역시 독립적으로 존재하되 신과 사랑하며 신께 의지하도록 만들어진 인간 (창조), 그 창조에 금이 가서 깨어진 관계와 망가져버린 세상 (타락), 그리고 그걸 해결하려 직접 오신 희생하신 신 (예수님의 죄 사함/십자가), 마지막으로 그 행동에 의해 나와 신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 (기독교의 구원) 이다.


2. 마음의 평화를 얻고 쉴곳을 찾기 위한 믿음이 아니라 이게 진리라고 생각하여 믿게 되었다. 결국 우리 모두는 무언가를 믿고 그 믿음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난 이 기독교의 믿음으로 세상을 비추어봤을 때 세상이 가장 설명되고 이해된다. 세상과 우리 안에 있는 선과 악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우리 안에는 왜 존재의 근원, 의미에 대한 갈망과 탐구가 존재하나. 우리는 우연인가 아님 어떤 의도성에 의해 창조되고 살아가는 존재인가. 이 모든 것이 기독교의 믿음에 입각해 봤을 때 더 잘 설명되고 이해된다.


3. 이 신앙의 본질을 빼고 나머진 미스터리와 해석의 영역이 분명히 있다고 본다. 다양한 교리 가운데 진짜 진리가 무엇인지가 나의 주된 관심사는 아니다. 나의 관심은 이 믿음을 통해 살아가보는 신앙생활이다. 그 미스터리를 내가 직접 느끼고 발견하고 알아가는 삶의 여정이다.


4. 모든 종교와 영성이 결국 같은 곳을 향한다는 생각의 흐름도 충분히 이해한다. 나도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기독교와 타 종교/영성 흐름, 특히 명상/수련 등 인간에 초점을 맞춘 영성생활과 구분되는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궁극적인 초월의 경지에 가는 것 - 그게 구원이든 열반이든 무엇이든 - 은 절대 나 혼자서 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사실 엄청나게 겸손하게 만드는 종교이다. 기독교의 신은 공짜로 우리에게 모든 걸 주신다. 그걸 은혜, 은총이라고 표현한다. 무조건적인 사랑, 용서, 영생, 생명, 부활, 그 모든 것을. 단 하나의 전제가 있다. 그건 그걸 "받아들이는 것"이다. 난 절대 나를 구원할 수 없다는 인정. 그리고 그걸 직접 해결하고 내게 손을 내미는 신을 받아들이고 믿는 믿음. 그래서 CS 루이스는 기독교의 신앙이 자신의 삶을 점차 "포위"해 왔다고 표현했다. 신이 엄청난 사랑과 은혜와 생명을 가득 가지고 우리를 포위(?) 하면서 한마디를 건네는 것 - "사랑하는 아들아 딸아. 너무 너를 사랑해서 내가 계속 문두들이고 있단다. 이제 그만 마음의 문을 열고 항복하렴. 이 모든게 너를 위한 것이지만 강제로 줄순 없단다. 니가 받을때까지 내가 기다릴게" - 이게 기독교가 아닌가 생각한다. 크리스천이 되는 길은 유일하고 단순한 길은 나를 사랑하는 나의 창조주에게, 나를 사랑해서 나 대신 죽으신 신에게, 나와 영원히 함께 하고자 두드리는 신에게 항복하는 것뿐이다.


Q. 자신만의 방식을 지키며 살아가기 위해 가지는 습관이나 시간이 있다면

1. 예배: 예배는 위에서 소개한 그 신과 내가 함께하는 시간이다. 그 시간의 주도권을 그분께 내어드리는 시간이다. 그 시간은 매우 다채롭다. 때론 그분을 바라보며 찬양하고 감사를 드린다. 때론 나의 어려움을 그분께 내려놓고 위로받는다. 때론 내가 좋아하는 걸 나누며 웃고 키득거린다. 때론 그분께 새로운 마음과 영감을 받고 설명되지 않았던 것들이 다 설명되며 뭉쳐졌던 것들이 풀어지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분과 함께하는 시간이라면 뭐든 예배가 될 수 있다. 교회에서 드리는 공동체의 예배뿐 아니라 내가 일하는 시간도, 아님 심지어 이 시간도 예배가 될 수 있다.


2. 그래서 예배는 내면의 성찰과 명상과는 다르다. 예배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다. 그분과의 관계가운데 존재한다. 내 안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진짜 진북은 내게 없다는 믿음에서 예배는 내 안에 있지만 또 나보다 무한히 크신 그분과 공명하는 시간이다.


3. 물론 나를 돌아보는 시간도 필요하고 나와 대화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사실 예배가운데 종종 성찰도 많이 한다. 단 그분이 있다는 걸 인지하고 나면 더 평안한 마음으로 안정적으로 내면에 집중할 수 있다. 마치 우리 막내아들이 부모가 근처에 있다는 걸 인지하고 더 즐겁고 편안하고 혼자 노는 것처럼, 나도 그분의 임재를 느끼며 더 나와 대화할 수 있다.


Q. 결혼생활에 대한 철학과 육아에 대한 철학을 나눠준다면

1. 어떻게 결혼생활 하는 게 중요하다는 각론으로 가기 전에 결혼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과 정의를 가지고 있는 게 나에겐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프란치스 챈 목사님이 You and me forever 이란 책에서 결혼을 영생을 위해 준비하는 과정 - 나도 최고버전의 내가 되고 아내도 최고버전의 아내가 되어가는 그 여정을 함께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게 내가 가지고 있는 결혼의 의미고 비전이고 메타포이다. 위에 소개한 나의 신앙관의 핵심은 각각의 개인은 고유의 독립된 인격체이자, 서로 온전히 사랑하고 헌신하며 연합할 수 있는 존재란 것이다. 지금은 비록 아픔 많고 문제 많은 세상에서 불완전한 두 개인이 만나 지지고 볶고 다투고 깎이고 상처 입고 주고 하지만, 결국 우리는 태초 그대로의 모습으로 회복되고 온전한 모습으로 피어나 서로 온전히 하나 될 것이라는 믿음이 근간에 있다. 부부의 연합은 그 삶을 준비하고 연습하기 위한 과정이다.


2. 그래서 난 아내가 진짜 아내다운 모습을 보일 때, 아내가 빛나고 아내가 피어날 때, 그걸 보는 게 큰 즐거움이고 기쁨이다. 감탄이 나온다. 그건 아내에 대한 감탄을 넘어 아내를 만들고 아내를 빚어가고 있는 그분에 대한 감탄이자 경외이다. 언젠가 그분과 함께 있을 때 아내는 얼마나 더 빛날까. 아내는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그런 상상을 한다. 그리고 겸손히 아내에게 의존하며 나도 더 그분을 닮아가고 그분이 만든 모습, 빚어가는 모습 대로 되어가기를 바란다. 그 과정가운데 넘어질지언정 그 지향점과 소망을 잊지 않는 것. 그게 내 결혼생활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3. 아이들에 대해 한마디로 하자면 그건 "선물"이란거다. 아이들이 내게 주는 사랑은 너무나 순수하고 조건이 없다. 아이들은 나를 그냥 좋아하고 내게 의지한다. 조건이란 게 없다. 맹목적으로 느껴질 때도 많다 (어릴수록). 아이들의 사랑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내게 의존하고 맡기며 하는 사랑이기에 부모에게서 받은 사랑과는 또 다르다. 내가 어디 누구에게 이런 사랑을 받겠는가. 힘들 때가 없는 게 전혀 아니지만 아이들은 진정 선물이다.


4. 아이들에게 바라는 교육철학은 아이들이 아이들답게 크는 것이다. 사랑 많이 받고 많이 노는 것. 이것저것 좋아하는 거 맘껏 시도해 보는 것. 단체활동들을 하면서 더 큰 세상을 보고 경험하고 성숙해 가는 것. 그런 것들이다. 나도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봤을 때 원 없이 논 것, 그리고 여러 경험을 했던 게 제일 기억에 남는다.


Q. 한국에 대해 어떻게 보는지? 젊은 세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1. 한국에 대해선 복잡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드웨어랑 소프트웨어로 나눠서, 위기와 기회로 나눠서 2x2로 생각해 본다. 하드웨어의 위기는 인구구조 문제, 정치 갈등과 포퓰리즘 등이 복합적으로 엉켜서 아무런 개혁도 못한 채 서서히 성장동력을 잃고 침몰해 가는 절대적인 위기가운데 있다고 본다. 하드웨어의 기회도 분명 있다 - 미중갈등, 글로벌다각화, 한국이 가진 인재의 힘과 이미 가지고 있는 산업들, 북극해협과 같은 지정학적 이점, 한국은 분명 세계강국이고 선진국이다. 소프트웨어의 위기는 잠재력발휘를 막는 엄청난 압박감과 이로 인한 의대/전문직쏠림/우울증/사회갈등/핸드폰중독 등이고 기회는 한류 소프트파워로 대표되는 한국인의 센스, 재치, 기지, 기질이라고 본다.


2. 이런 상황에서 한국에 비관론을 갖고 모든 걸 냉소적으로 보거나 한국탈출을 꿈꾸는 젊은 세대도 많다는 걸 충분히 인지하고 이해한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 한국밖의 시각도 꼭 들어보고 한국밖의 경험도 해보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일례로 내가 강의한 한양대 경영대 외국인 학부생들의 대부분은 한국을 "희망의 아이콘"으로 보고 있다. 그들 (특히 아시아출신 아이들)에게 한국의 이야기는 기적의 이야기이고 한국의 K pop 스타들은 희망의 아이콘이며 한국은 아시아의 자부심이라고 들으니 어안이 벙벙했다. 정작 우리는 다 희망이 없다며 탈조선 헬조선을 외치고 있는데. 이렇게 한국을 사랑해 주고 관심 가져주는 사람들이 많구나.


3. 한국에 다음 세대들이 어떻게 이바지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일단 이바지란 단어가 좀 거창하다. 요즘 같은 개인주의, 그리고 소위말해 각자도생의 시대에서 과거 세대와 같이 국가와 사회란 문법으로 살아야 한다는 논리는 공허하다. 난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으로 접근해 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우린 사실 뭔가 기여하기를 바라고 기여할 때 행복과 에너지를 느낀다. 그런 존재들이다. 그래서 기여함 없이 늘 뭔가를 얻고 취하기만 해야 한다고 (take only, not give) 배워왔고 살아왔다면 그건 반쪽짜리도 안 되는 삶일 수 있다. 삶의 아주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기여할 때, 내가 가진 무언가를 줄 때, 나의 삶과 우리의 삶이 얼마나 풍성해지는지를 경험해 보면 기여하기는 더 이상 사치가 아니라 삶의 일부분이 될 수 있다. 내가 하는 펠로우십 등의 활동도 지극히 개인적인 동기에서 하고 있다. 거창한 목표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재미있고 즐겁고 의미 있어서 하게 되지 아니면 진작에 힘들어서 그만뒀을 것이다. 그렇게 작은데에서부터 접근해 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4. 마지막으로 이런 이야기에 더해 일반적으로 젊은 세대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 이렇게 살아야 된다 이런 건 매우 조심스럽다. 사회에 조언가와 전문가는 너무 많은데 진정 어른은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다. 인터넷에 정보와 "should - 이래야 한다"의 문법이 너무 넘쳐난다. 현기증이 날 정도다. 난 그냥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좀 와서 쉬라고. 좀 놀아도 된다고. 그 대신 신나게 재밌게 본인답게 그리고 주위사람과 함께 한번 놀아보라고. 그런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다. 주위를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쉼 속에서 성찰을 하거나 몰입 속에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그리고 그들이 "불안"해서가 아니라 "즐겁고 몰입되기에" 무언가 제대로 해보려 할때, 그걸 충분히 밀어주고 응원해줄수 있는 사회와 환경과 문화를 만드는데 계속 힘써보고 싶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남자들도 속마음이란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