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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큐레이터 수첩 May 08. 2020

[라오미] ‘진짜 두꺼비를 가진 상상의 정원’으로의..

2020. 송은아트큐브

진짜 두꺼비를 가진 상상의 정원으로의 여행     


대부분 그림은 그림 안을 보게 한다. 

무엇을 그렸던 혹은 어떻게 그렸던. 

회화의 한계를 벗어나려고 캔버스를 붙이고 세우고, 겹쳐도 

결국 시선은 캔버스 안에 머무르게 된다. 

그런데, 그런 그림이 있다. 

그림의 안에 한정되지 않는 그림. 분명 그림인데, 영상 같은 그림, 

분명 그림인데 공간과 대화하는 그림, 그렇게 관객에게 속삭이는 그림. 

이야기를 하는 그림. 관객을 움직이게 하는 그림. 

그렇게 어떤 기억을 공유하게 하는 그림. 

라오미의 그림이 그랬다.      

작품 제목에서 가져온 전시 <상상의 정원에 진짜 두꺼비들을>은 작가 라오미의 어떤 여행에 대한 이야기다. 그렇다고 특정 여행을 반복적으로 기술하는 여행이 아니다. 전시 제목에서 보이는‘상상’과 ‘진짜’의 충돌처럼. 이 여행은 상상이기도, 진짜이기도 하다. 그림과 그림 사이, 그림과 설치 사이, 그림과 사운드 사이를 오가는 관객이 만들어가야 하는 여행이다. 작가 라오미가 화면과 공간에 재구성한 ‘상상의 정원’을 따라가는 그런 여행이다.    


<상상의 정원에 진짜 두꺼비들을> 전시전경

지금부터 그녀를 따라 간 그 여행을 이야기하려 한다.      

이야기의 시작은 관객에게 등을 돌린 채 동그랗게 둘러앉아 그림을 안으로 감추고 있는 병풍들에서 시작한다. 그녀는 단둥의 한 골동품가게에서 이 인쇄병풍 그림들을 발견했다고 했다. 그런데 작가의 시선을 끌었던 것은 병풍의 그림이 아닌, 병풍 뒤에 배접지였단다. 배접지에 남아 있던 매일신보, 1930년대 일본 신문들, 함경남도 문천에 있었던 조선오노다시멘트회사의 포대자루의 흔적을 쫒다 보니 이 병풍 그림의 행로가 보이는 듯 했단다. 그녀는 이 병풍이 아마도 서울, 함경남도, 신의주를 거쳐 작가가 있던 단둥에까지 오게 되었을 것이라 추측했다. 우습지만, 그림이 아닌, 병풍의 뒷모습이 그림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삶의 실상은 어쩌면 병풍의 뒷모습 같은 것이 아닐까. 앞에서, 겉에서 바라보는 화려함이 아닌 찢기고 덧댄 기억의 편린들이 켜켜이 쌓인 뒷면 같은. 그러고 보니, 이 인쇄병풍은 인천항 떠나 단둥을 오가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기억과 추억을 쌓았을 작가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상의 정원에 진짜 두꺼비들을> 전시전경
<상상의 정원에 진짜 두꺼비들을> 전시전경
<상상의 정원에 진짜 두꺼비들을> 회화 부분 이미지

수집한 인쇄병풍과 전시의 제목이기도 한 <상상의 정원에 진짜 두꺼비들을> 사이에는 푸른 벽이 있고, 그림이 걸린 면의 뒤편에는 수집한 폐영사기 램프들이 가지런하게 놓여있다. 넘실거리는 물결의 뒤쪽으로 선명한 듯 어린 듯 이미지들이 보인다. <상상의 정원에 진짜 두꺼비들을>은 인천항에서 출발해서 단둥으로 향했던 배의 뒷모습을 그렸다고 했다. 아마도 선명한 듯 어리어리한 이미지는 작가가 만났던 탈북할머니, 미림극장 워크숍에서 만났던 할아버지, 그리고 그들에게서 들었던 삶의 이야기들인 듯했다. 분명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을 텐데, 화면에 그려진 이미지들은 각기 다른 시간의 흔적들을 다 지운 채 함께 있는 상상의 정원에 있는 듯했다. 

흥미롭게도 벽 뒤에 설치된 이제는 작동하지 않은 오래된 폐영사기들 때문인지, 그림 속 이미지들이 오래된 영사기를 통해서 서서히 움직이는 영상처럼 느껴졌다. 화면에 적잖이 노이즈가 생기는 그래서 희끗희끗 잘 알아볼 수 없는 이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실재했던 사건들. 두꺼비들.     


for inspection, imaginary gardens with real toads in them,
    shall we have

 it. In the meantime, if you demand on the one hand, in defiance of their opinion-

 the raw material of poetry in

   all its rawness, and

   that which is on the other hand,

   genuine, then you are in interested in poetry.     

검사를 위해 출두할 수 있기까지는 아니지요, :"진짜 두꺼비가 있는 상상의 정원," 
   을 우리는 가질 
  거예요. 이야기는 바뀌어, 한편으로 
  그 모든 날것 안에서
   시에서 날것을 요구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다른 한편으로
   참되다면, 당신은 시에 관심을 갖게 되겠지요..          


마리엔 무어(Marianne Moore)는 <시 Poetry>에서 ‘진짜 두꺼비가 있는 상상의 정원’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리고 이 구절은 그녀의 시선을 잡았다. 무어는 단어들을 가지고 만들어내는 ‘시’라는 장르를 표현하는데 썼지만, 역사적, 문화적 자료들을 바탕으로 특정 장소에 관한 서사와 이미지들을 아카이브하고, 또 그것을 바탕으로 상상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라오미 작가의 방식과 닮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에게 정원은 장소 혹은 화면을, 두꺼비는 사물 혹은 화면 속 이미지에 대한 은유로 보였다. 진짜 두꺼비를 가진 정원은 그녀가 만들어내는 회화라는 작품이었기에.      

자, 이제 본격적으로 그 정원에 들어가보기로 하자.     

<끝없는 환희를 그대에게 Per te d’immenso giublio>.
<끝없는 환희를 그대에게 Per te d’immenso giublio>. 부분


<끝없는 환희를 그대에게 Per te d’immenso giublio>. 부분

전시장에 들어서면 대형 그림이 나를 맞는다. <끝없는 환희를 그대에게 Per te d’immenso giublio>.

‘끝없는 환희를 그대에게는 <금수강산>이라는 노래의 원곡명이라고 한다. 그녀는 한창 번안곡이 유행했을 시절을 생각하며, 이미지를 화면에 옮기는 것이 번안하는 행위로 인식했고, 이러한 태도를 제목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다. 대형 화면에 펼쳐지는 유람선, 배 갑판에 서 있는 사람들 해항 도시 단둥의 모습과 근대건축물들, 강가에 신의주 공장, 여기저기 세워져 있는 모뉴먼트, 설화에서 수집된 이미지와 단둥에서 발견한 인쇄병풍의 그림 등이 펼쳐져 있다. 가로 5m가 넘은 이 거대한 그림 앞에 서면, 마치 그림 속 어디엔가 서 있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수십 년의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가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곳은 상상의 정원이다. 그림 속 이야기는 진짜를 배경으로 하지만, 여전히 상상이다. 그것도 작가 라오미의 기억으로 번안된 상상이다. 게다가 그림 바깥으로 보이는 각목으로 만들어진 벽면과 그 뒤에 가지런히 내려앉은 하얀 커튼은 지금 이곳은 그녀의 상상 정원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다시 한번 환기해 주는 듯하다.      

<상상의 정원에 진짜 두꺼비들을> 전시전경

하얀 커튼. 

이번 전시에서 하얀 커튼은 중요하다. 그것은 작품과 작품을 구분하는 벽을 대신하는 동시에 작품과 작품을 이어준다. 그뿐만 아니라 작품을 지탱하는 그녀의 방대한 리서치를 대변하는 자료들을 살포시 보듬는다. 게다가 공간을 나누면서 이어주는, 보여주면서 감추는 이 하얀 커튼은 심지어 촉각적이기까지 하다.     

커튼의 뒤로 슬며시 돌아가본다.

<상상의 정원에 진짜 두꺼비들을> 전시전경

오래되어 보이는 극장 의자 하나가 눈에 띈다. 다가가니 그 위에는 의자 커버인 듯 보이는 천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맨 위에 보이 커버에는 343이라 쓰여 있다. 그리고 어디선가 속삭이는 이야기가 들린다. 의자 옆에 비껴있는 푸른 벽엔 작가의 작품으로 보이는 것과 어디선가 수집한 듯 보이는 자료들이 정갈하게 걸려있다. 작가의 리서치를 담고 있는 이 푸른 벽은 <끝없는 환희를 그대에게>를 바라보고 있다. 마치 <끝없는 환희를 그대에게>라는 작품을 만들기 위한 인덱스처럼. 하지만, 그것은 아카이브가 아니다. 하나의 온전한 작품을 담은 공간이다. 두꺼비가 있는 정원이다.     

쉿! 이야기가 들린다.

<상상의 정원에 진짜 두꺼비들을> 전시전경

뭐라고 하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듯한다. 나중에 작가에게 물어보니 호랑이 목격담이라 했다. 무슨 내용인지 정확히 파악되지 않더라도 열려진 이 작은 목소리가 각기 다른 작품들과 자료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듯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정원’에는 또 다른 ‘목소리들’이 있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요코하마 초등학생의 작문과 가토 기요마사의 호랑이 사냥 전설을 이야기하는 목소리. 그녀는 일본어로 된 텍스트를 소박한 액자에 담아 무심한 듯 벽에 걸었다. 그리고 헤드폰을 통해 그 이야이야기들을 목소리로 번안하여 ‘듣게’하였다. 보는 것에 더해지는 듣는 이야기. 서사가 더해지고 감각이 더해지면서 작품에 좀 더 몰입하게 되고, 몸으로 기억되는 여행이 되었다.     


<상상의 정원에 진짜 두꺼비들을> 전시전경

파란 벽을 돌아가 보자. 하늘색 벽이 드러난다.

그 벽에 걸린 두 개의 그림

인천과 요코하마의 풍경과 작가가 마주한 사건들을 담고 있는 <동시적 환상>

인천 북성포구에 정착해 있는 어선,

그리고 북성포에서 출발한 페리에서 보았던 단동의 풍경을 담은 <표류를 위한 항해술>

파스텔톤의 하늘색이 무색할 정도로 그림은 어둡다. 아니 절망스럽다 해야 할까. 비극적이라 해야할까. 그림을 보는 내내 뭔가 묵직한 것이 마음 한 켠에 내려앉는 듯했다. 역사라는 거대한 서사가 뭉치째 눈 앞에 펼쳐진 느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지들 사이사이의 황금색. 짙은 회색과 황금색의 만남은 무척 어색한 듯 하면서도 그림 속 이미지들이 살아있게 한다. 암울해 보이는 풍경 속 건물에서 금분으로 반짝이는 창은 들어와 보라고, 그래도 괜챦다며 자꾸만 시선을 끈다.     

<상상의 정원에 진짜 두꺼비들을> 전시전경


그리고 다시 살짝 비치는 커튼 사이에 계단처럼 설치된 사진 아카이브를 본다. 설치 구조상 하나하나 상세하게 살펴볼 수는 없지만, 상관없다. 그것은 그저 두꺼비다. 그녀가 상상의 정원을 만들었던 진짜 두꺼비들이다.      

많은 경우, 작가들은 그들의 진짜 두꺼비들을 보여주지 않는다. 혹여 보여준다고 하더라고, 정원 안에 두려고 하기보다는 따로 ‘아카이브 섹션’으로 따로 만든다. 혹은 작가와의 대화 같은 형식을 통해 슬쩍 암시한다. 그런데 그녀는 진짜 두꺼비들을 드러내 버렸다. 덕분에 그림의 이야기는 한층 풍부해진다. 과하지 않게, 적당하게 보여지고 감춰지면서 공간에 자리하고, 그 안에서 다시 그림과 소통하면서 또 다른 이야기를 파생시키는 흐름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전시는 정적이지 않다. 그것은 그림 속 서사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진짜 두꺼비들을 가지고 만든 정원의 치밀함 때문이다.      


서서히 여행도 끝나간다.

단둥에서 만났던 병풍의 뒤에서 시작하여,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시간을 넘나들며 작가의 기억으로 번안된 ‘진짜 두꺼비’를 가진 시각적이고, 촉각적이고, 청각적인 ‘상상의 정원’여행은 그렇게 끝이 났다. 여행의 끝에서 무어의 <시>를 되짚어 본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무어의 시는 작가 라오미의 작업과정을 닮아 있었다. 이 글이 그녀의 ‘상상의 정원’을 여행하는 다음 여행객을 위한 작은 안내서가 되기를 바라며...     


그 모든 날것 안에서

   ‘그림’에서 날것을 요구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다른 한편으로
   참되다면, 당신은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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