곶 - 숲을 뜻하는 제주 방언
빈 엽서를 앞에 두고 무언가 써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여러 색의 색연필을 받았지만 무슨 색을 고르건 의미가 없었다. 나는 세화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관광객이라면 한 번은 들르는 커다란 카페였고, 어느 정도는 견딜 만한 추위였기에 손님들을 피해서 바깥에 자리를 잡았다. 종업원이 주문한 커피와 함께 주는 엽서를 나는 처음에는 거절하려 했다. 망설이던 손을 이내 거둔 건 그 엽서가 작고 새하얀 공간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우체통에 엽서를 넣는 시늉을 하며 그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바다 앞 카페를 찾기 위해 인스타그램을 검색하다 발견한 우체통 카페가 이곳임을 그제야 알았다. 내가 잡은 자리는 우체통 오른편에 동떨어진 곳이어서 그들을 무심히 관망하기 좋았다. 서로를 번갈아 가며 한 번씩 찍어주거나, 옆에 있던 다른 손님에게 함께 찍어달라고 부탁하는 가족과 친구와 연인들이 연이어 우체통을 지나갔다. 그들은 모두 즐거워 보였고, 그것이 나를 외롭게 만들었다.
해변을 따라 굽은 도로와 수문처럼 일자로 길게 놓인 암석은 구석에 작은 호수를 만들기에 충분했다. 간조가 되면 얕게 드러나는 호수의 바닥이 내 눈앞에 있었다. 시선을 멀리 옮겨 곳곳에서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았다. 나는 밀린 숙제를 떠올리듯 바다의 의미를 다시금 고민했다. 수많은 사람이 바다에 보편적이든 특별하든 각자의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함께 세화에 온 두 음악가 친구 중 하나에게는 바다가 자유였다. 그래서 밤바다를 보고 ‘달이 비춘 길을 따라가’겠다는 가사를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고향이 부산이던 다른 친구에게는 바다가 일상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걸어 나가 수평선을 바라볼 수 있었지만 상경한 뒤로는 그러지 못해서 답답하다고 했다. 미리 제주에서 몇 개월을 머무르고 있던 그는 그간 못 봤던 바다를 맘껏 본 덕에 건반 위를 오랜만에 편히 거닐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끝내 나는 바다로부터 어떠한 의미도 찾지 못하는 것일까.
바다로부터 아름다움을 못 느끼는 것은 아니다. 구름 사이로 새어 나온 햇빛이 바다에 숨겨진 깊은 푸름을 끌어내는 힘을 알고 있다. 해변으로 밀려오는 파도는 바다 한가운데서 수십 번은 바람에 산산조각이 나고 도착했을 것이다. 바다 수면 위와 아래로 무수한 생명이 나고 사라진 것을 안다. 그런데도 바다는 내게 특별하지 않았다. 마치 디지털 가전 코너에 진열된 텔레비전의 영상을 보는 것만 같았다. 똑같은 모양의 파도가 똑같은 암석에 부딪히며 부서지기를 무한히 반복하는 공허함. 바람을 타고 오는 옅은 바닷냄새를 맡고 있으면서도 이러한 감정이 드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카페 앞 주차장의 차들이 몇 번은 바뀔 동안 바다를 노려보다가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내 눈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어느 곳에도 제대로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걸 알게 된 순간 울음이 터져 나왔다.
왜 나는 무엇도 또렷하게 보지 못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미약하게 있던 난시가 더 심해진 탓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이 눈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분명 나는 알고 있었다. 예전보다 어딘가에 집중하는 걸 잘하지 못한다. 무언가를 창작하며 살겠다고 먹었던 마음이 흐려져 갔고 나는 이를 어찌할 수 없었다. 아니, 그렇게 되도록 보고만 있었다. 전처럼 붙잡으려 하지 않았고 이에 분노하거나 안타까워하지도 않았다. 나의 탓이 아닌 일에 나의 탓을 하는 것이 익숙해졌고, 어느새 운명이라는 사나운 핑계를 미워하기보단 나를 그것에 기대었다. 꾸준히 시간에 떠밀리면서 넘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걸을 수 있도록 중심을 잡아 왔다.
그러니까 눈앞이 흐린 건 내가 놓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살아내는 것에 집중하길 포기한 것이었다.
파도는 전과 같이 해변으로 밀려와 모래를 헤집고 돌아가길 반복했다. 우체통 앞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수가 줄어들었다. 애써 외투 속에 가두었던 온기는 내게서 떠나간 지 오래였다. 뺨에 흐르던 눈물은 그새 말랐고, 빈 커피잔 앞에 놓인 엽서는 여전히 비어있었다.
힘겹게 끼워 맞춘 퍼즐이 바닥에 쏟아진다. 온전한 나의 모습으로 남지 않은 기억의 파편들. 추억이라 부르기엔 어딘가 불편한 순간들. 퇴고하지 않으면 영원히 굳어버릴 형상들. 풀리지 않은 나의 과거가 현재에 머무르며 미래를 망치고 있었다.
이제는 말해야만 한다. 나 자신조차 속이며 살 수는 없었다. 부정과 회피를 따라가면 결국 홀로 벼랑 끝에 서 있을 것이다. 그 앞에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중심을 잡고 버티다가 정신을 잃고 뛰어내릴지도 모른다. 차라리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보면서 넘어지자고. 주변에 함께 넘어진 누군가와 손을 붙잡고 일어설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더 추워지기 전에 색연필을 들어야 했다. 나는 새하얀 공간에 투박한 문장을 적었다. 다듬어지지 않아 거칠기까지 한 문장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는 목에 걸려있던 돌을 내 손으로 직접 꺼내 올리는 일이었다. 두렵고 고통스러울 테지만, 분명 전보다 편히 숨을 쉴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고 오른쪽 모서리에 날짜와 이름을 새겼다. 쥐고 있던 색연필을 놓은 나는 고개를 들었고, 짧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그제야 바다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거대한 단색 추상화였다.
시간을, 생명을, 그리고 마음을 품을 줄 알았다.
파도는 이를 보고 있는 나의 일렁이는 감정이었다.
그간 나는 이 아름다움을 포기해왔다.
엽서는 우체통이 가득 차면 몇 달 뒤에 한 번에 보내준다고 했다. 많은 이의 마음이 동시에 출발해 이곳에 다녀갔다는 것을 잊고 있을 때쯤 도착할 것이다. 그들과 뒤섞여있다가 도착할 나의 마음을 과연 미래의 내가 기쁘게 받을 수 있을까. 아마도 그는 스스로를 가둔 숲 속에서 조금씩 걸어 나오고 있을 것이다. 그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나는 하나의 다짐을 하며 종이배를 바다에 띄우듯 우체통 안으로 엽서를 밀어 넣었다.
이 마음을 긴 글로 다듬으리라.
파도가 저 암석을 깎아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