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와 향신료에서 시작하는 상인 콘텐츠 이야기
역시 내가 늙어버린 것인가? 요즘 애니메이션 중에 볼만한 것들이 없다. 뭔가 우당탕탕 거리긴 하는데 스토리가 허술하달까, 5분만 봐도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너무 뻔하달까? 아니면 내 감각이 옛날 스타일이고, 요즘 트렌드에 적응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낼모레면 지천명의 나이니 당연할지도.
그래서 넷플릭스를 뒤적뒤적거리다 '늑대와 향신료'라는 애니메이션(지금은 넷플릭스에 없음)이 눈에 띄었다. 맞아! 이 애니 참 재미있었지. 2008년에 나온 오래된 애니메이션이지만 소재가 아주 신선했다. (원작은 라이트 노벨이라고 하는데 중요하지 않으니 넘어가고) 장르적으로 말하자면, 중세 판타지 경제 애니메이션? 한마디로 중세 시대에 환상적으로 장사하는 이야기다.
주인공인 로렌스(25세. 남)는 가게 없이 돌아다니면서 장사를 하는 행상이다. 언젠가는 본인의 가게를 차리는 게 꿈인 이 남자가 우연히 만난 귀인은 사람이 아닌 늑대 신(현랑) 호로(000살?. 여). 늑대의 모습을 한 신이지만 평소에는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함께 다니는데 문제없다. 귀가 가끔 쫑긋쫑긋 하지만 귀여움을 위한 필수 요소. 호로는 추정할 수 없는 나이만큼이나 현명해서 로렌스를 파산의 위기에서 구하기도 하고, 큰돈을 벌게 해주기도 한다.
'늑대와 향신료'는 늑대 귀가 달린 호로와 젊은 행상 로렌스의 꽁냥꽁냥 썸 타는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위기 끝에 거래를 성사시키고 큰돈을 벌게 되는 이야기가 중심이다. 그런 이야기가 재미없을 리 없지. 5억만 년 전에 방영됐던 K-드라마 '상도'도 이런 재미가 있었다.
늑대와 향신료, 상도 같은 상업 드라마에서 긴장을 유지하는 장치 중에 하나는 서로 다른 진영의 길드, 상인 조직이다. 상인 조직 간의 싸움은 치열하고 잔혹하지만 은밀하게 진행되며 대중에게 잘 드러나지 않는다. 주요 키워드는 #정보력 #절대신용 #폐쇄적조직
중세 상인 조직은 카르텔, 비밀결사의 형태를 띠기도 했다. 이익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지만 조직의 이름에 걸린 신용을 죽음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그들의 가장 큰 자산은 조직의 이름에 쌓인 신용, 인지도이기 때문. 이것은 '왕좌의 게임'의 칠 왕국 중 가장 부자인 라니스터 가문이 '라니스터는 언제나 빚을 갚는다'라고 귀가 닳도록 말하는 이유일 것이다.
어떤 길드는 특히 높은 품질과 비싼 가격으로 명성을 유지했고, 지역의 생산권과 상권을 독점하며 조직을 위해 적을 죽이기도 했다. 조직원의 수를 조절해 분배의 균형을 유지하기도 했으니 결국 통제를 통해 이익의 창출했던 셈이다.
통제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다. 외부의 정보를 빠르게 수집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내부의 정보는 유출되어서는 안 된다.
남대문 시장에 가면 도매상인들은 손님이 소매장인지 소비자인지 한눈에 알아본다. 그리고 그들만의 언어로 가격을 흥정한다. 소비자에게 노출되면 큰일!
'언니, 이거 몇 개야?'
'응. 언니야, 그거 00개야'
어릴 적 갔던 어머니를 따라갔던 새벽 시장의 상인들의 말은 한국말이지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가격을 물어보는 것 같은데 왜 개수를 말하는 거지? 그리고 숫자에서 단순히 0을 빼는 방식은 아니고 뭔가 다른 체계가 있는 암호 같았다.
상인들의 단합과 잔혹성(?)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었으니, 상가에서 오래 동안 활동하던 좀도둑이 잡힌 것이다. 잔뜩 독이 올라있던 차에 잡힌 좀도둑. 어떻게 됐을까?
내가 웬만한 좀비 영화, 유혈이 낭자하는 범죄영화도 짜파게티 먹으며 낄낄 거리지만, 그 장면은 정말 무서웠다. 주변의 상인들이 모두 몰려와 이 좀도둑의 머리, 팔, 가슴팍 등 잡히는 데로 잡고 흔들어댔다. 그리고 아주 진한 욕설이 난무했다. 내 기억 속 이미지는 모든 동작이 슬로우 모션으로 움직이며, 격렬한 움직임과 침이 튀며 입이 보이지만 소리는 없다. 그래서 더 무섭다. 잘못은 좀도둑이 했지만 좀도둑이 불쌍할 지경이었다.
그 상인 중 한 명이었던 어머니는 잔뜩 쫄아있는 나를 보며, 다시는 좀도둑들이 엄두도 못 내도록 본보기를 보이는 것이라고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천사 같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착하신 집사님이 이런 줄이야! 집사고 목사고 간에 상인은 다르구나.
아는 사람들이 와서 엄마(위에는 어머니라고 했지만 솔직히 그렇게 불러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가게에 와서 가격을 지나치게 깎는 것을 볼 때마다 난 힘들게 일하는 엄마를 보며 속상해했다. 그런 나에게 엄마가 한 말은, "그래도 다 남아."
'장사는 이문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라고 상도의 임상옥은 말했지만, 드라마 속의 말장난이다. 상업의 기본은 이윤을 남기는 것이고, 그래야 사람이 남는다. 이윤이 없는 곳에 사람은 남지 않는다.
생존을 위해 모인 상인 조직의 초점은 단순하고 집요하다. 세대를 이어가는 공동의 이익, 공동의 자산.
현대의 기업 조직은 중세의 길드와는 다르다고 하지만 대기업들을 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노선을 탈 것이......냐! 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