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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대현 Jun 02. 2016

배움이 일어나는 수업을 위한  몇 가지 전제

 배움이 일어나는 교실(1)

1. 모든 것에 대한 부정


수업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말이 어느덧 지금을 살아가는 교사에게는 너무나 당연스러운 말이 되어 버렸다. 변하지 않는다면 뒤쳐진다는 불안감 속에 교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며 고민을 시작한다.


무엇을 바꿔야 하나? 어떻게 바꿔야 하나?


그래서, 교사는 새로운 수업방법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수많은 연수를 부지런히 쫓아다니며 배운 내용을 자신의 수업에 적용해본다. 학생들이 즐겁게 반응하며 수업을 하며 만족해하는 것도 잠시 어느 순간 다시 예전과 똑같이 되어버린 수업을 보며 실망하게 된다.


여기에서 교사는

"원래 세상 사는 게 다 이런 거지"라는 현실과 타협하는 길과

"도대체 왜 수업을 바꾸라는 거지?"라는 현실을 부정하는 길의 두 가지 갈림길에 선다.


현실과 타협하는 교사는 현재의 교육문제는 나의 수업이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로 교사 개인이 이것을 해결할 수 없고 외적 변화가 일어날 때야 비로소 해결이 될 것이라는 수동적인 생각에 근거한다.

반면에 현실을 부정하는 교사는 수업의 변화에 대해 자신만의 논리를 가지고 저항하며 '나는 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자기 부정으로 방어한다.

그런데 '왜 수업을 바꾸라는 거지?'라는 질문에 대해 자기 부정을 넘어서 끝까지 밀고 올라가는 교사가 생긴다. 그는 자신의 교실을, 수업을, 학교를, 교육을, 사회를 부정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모든 것을 부정하고 제로베이스에서 자신의 고민의 시작을 원점으로 되돌려 버린다.


2. 수업에 대한 새로운 전제


역설적으로 모든 것에 대한 부정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존의 모든 개념을 무화(無化)시켜버리기도 하지만 이것은 또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힘을 부여한다.


(1) 인식은 오로지 실천을 통해서만 확보된다.


무엇보다 첫 번째 전제는 자신의 실천을 통해 인식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연수나 강의가 의미가 없는 이유는 다른 사람이 자기 실천을 통해 확보된 개념은 그 피상적인 부분은 전달될 수 있어도 본질적인 부분은 전달이 될 수 없다. 수업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이다. 수업에 있어서 학생들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말만 들었을 때는 나는 그 의미를 알았지만 몰랐다. 결국 수업을 통해 학생들과 겪어가면서 그 관계에 대한 의미를 매 순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타인이 실천을 통해 얻은 획득한 자기 개념은 '완료 시제'이다. 하지만 자신의 수업 상황은 늘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에 적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학생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가능성이 있는 존재라는 말을 백번 들어도 아무런 변화는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수업을 통해 자신의 '점프'를 경험하는 순간 학생도 자신의 변화 가능성을 믿게 된다. 강의식 수업을 할 때 매번 엎어져서 잠을 자던 학생이 있었다. 앞에서 나는 열심히 수업을 하고 있는데 늘 그 학생이 잠을 자는 모습을 보며 나는 기분이 나빴다. 거꾸로교실 수업 활동을 하는데 '조침문'이라는 고전수필을 패러디해서 모둠끼리 글을 써보는 활동을 했다. 그런데, 매일 잠만 자던 친구가 그날 눈을 빛내며 열심히 글을 썼는데 그 제목은 자신의 '썸'이 끝남(짝사랑하던 남자아이가 다른 여자친구가 생긴 날)을 슬퍼하는 내용이었다. 훌륭한 패러디물이었고 나는 칭찬할 수밖에 없었고 그 아이는 스스로 자신은 문학에 재능이 있다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보고 싶다 그여, 카톡 내용을 보니 설레지 아니하였던 적이 없네"


교사도 학생도 인식의 변화는 오로지 실천을 통해서만 확보되는 것이다.

'조침문'의 고전수필 수업을 단지 패러디 글쓰기 활동으로 변화 시켰을 뿐인데 수업시간에 늘 방관자였던 학생이 자신의 연애를 바탕으로 훌륭한 글을 완성했다.


(2)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억압에서 해방시켜야 한다.


최초의 사피엔스는 15만 년 전 동아프리카에서 탄생했을 것이라고 추측되어진다고 한다. 그때 인류는 오로지 사피엔스 하나의 종만 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네안데르탈인은 사피엔스보다 거대했으며 두뇌의 용량도 훨씬 컸다. 하지만, 사피엔스가 등장하고 10만 년이 지났을 때 대부분의 다른 인류의 종은 멸종했으며 사피엔스는 전 지구를 지배하는 종이 되었다.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유발 하라리의 저서 '사피엔스'를 가지고 학생들과 독서토론을 하고 있을 때 어떤 아이가 이렇게 물었다.

"왜 사피엔스는 추위를 무릅쓰고 시베리아를 지나 알래스카를 건너 아메리카로 이주했으며, 목숨을 걸고 100KM가 넘는 해협을 건너 호주 대륙에 정착을 했을까?"

같은 시기의 네안데르탈 역시 이동을 했으나 결코 살기 불가능한 북방 한계선을 넘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 사피엔스는 여전히 끊임없이 우주를 관측하며 우주선을 띄어 보내고 있다.  독서토론의 결론은 사피엔스는 '호기심'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었다.

원래 우리는 '호기심'을 가진 종이다. 호기심은 '저기에 무엇이 있을까?'라는 상상력에서 시작된다. 네안데르탈인보다 작은 뇌를 가졌지만 사피엔스의 뇌는 '상상'의 장치를 구동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상력'의 힘은 사피엔스가 대규모 '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했으며 또한 단지 DNA로만 종의 특이성을 전수하는 것에서 벗어나 '문화'를 전달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이 근원적 호기심을 근대적 학교는 그동안 억압해 온 것이다. '표준화' 장치로서의 학교는 지적 표준을 제시하고 이러한 표준을 달성하는 학생과 그렇지 못하는 학생을 구분하는 역할을 그동안 수행해왔던 것이다. 표준화의 기준에 합치되는 학생은 지지를 받지만 그렇지 못하는 학생은 지지를 받지 못한다. 이것이 오랜 시간 동안 계속되면 학생은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해 버린다.


그러나, 탈근대의 시대에서 더 이상 표준화 장치가 힘을 잃어버리고 개개인의 창의성이 존중되는 시대에서는 더 이상 표준화의 규준점으로 근대적 학교는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또한 교사 역시 더 이상 표준화의 기준을 제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학생들이 이미 잠재적으로 가두어되어 버린 표준화의 기준점에서 스스로를 해방할 수 있도록 지지해주는 조력자로서의 역할로 변해야 한다.


리그오브레전드란 게임은 5명의 정교한 협업을 바탕으로 진행되며 남학생들은 이러한 작업을 매우 훌륭하게 수행해내며 완벽한 협업을 발휘해낸다.


(3) 실패를 실패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자기 자신이 완벽하기를 바란다. 특히 교사는 이러한 완벽함에 더욱 치중하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완벽한 존재는 없다. 또한 완벽한 수업도 없으며 그래서 완벽한 인생도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이고 완벽함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갈 수 있지만 그 이데아에는 결코 도착할 수 없는 존재이다.


활동 중심 수업을 전개할 때 과연 아이들이 배우고 있는가?라는 걱정이 앞선다. 강의를 통해서 이 지식의 완벽하게 정리해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교사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러나 완전한 지식이란 없다.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며 맥락 속에서 끊임없이 변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고정화해서 학생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사기다. 학생들은 모둠 활동 속에서 마치 떠들고 있는 것 같지만 침묵 속에서 한 사람의 말을 끊임없이 전달만 받는 교실과 비교했을 때 확실히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선생님 우리 진도는 언제 나가요?"라는 질문 속에는 이미 우리가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수업이 측정을 위한 도구적 지식을 전달받는 것이라는 것에 전제를 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과감히 이 전제를 부정해야 한다.


'거꾸로교실'에서 교사가 제작하는 동영상도 이러한 불완전성에 기초한다. 학습 영상이 그 안에서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완결된 구조라면 이후에 이루어지는 수업은 의미가 없다.

언젠가 학습 영상을 제작하다 설명 내용이 잘못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찾아와 잘못된 부분을 찾고 수정하면서 더 많은 배움이 일어날 수 있었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해 버린 것이다. 심지어는 학습 영상을 만들지 못한 적도 있었다. '반사실주의'와 '부조리극'에 대한 정의적인 설명은 오히려 학생들의 학습을 고정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고민을 하다 아이들 앞에서 강의 영상 제작 실패를 선언하고 학습 영상을 준비한 내용을 나누어주고 스스로의 이해를 구했다. 학생들은 처음에 어리둥절 했지만 자기 스스로의 해석을 시도했고 '반사실주의 UCC' 제작 과정을 통해 '반사실주의'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학생들은 반사실주의 요소를 담은 UCC를 제작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배움을 활동을 통해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수업활동에서도 충분히 실패가 발생할 수 있다.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에서 '어떠한 제도나 이념도 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 오로지 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한 사람뿐이다'을 읽고 감명을 받고 만든 활동 수업이 완전히 실패한 적이 있었다. 모둠별로 색지에 자기 모둠이 맡은 부분에 대해 연구하고 그 내용을 다른 색지의 모둠원들과 계속해서 교환하면서 소설을 이해하는 활동이었다. 처음에는 학생들끼리 서로 배우고 가르치며 잘 진행되는가 싶었지만 색지의 교환이 세 번째, 네 번째로 접어들면서 점점 교실은 혼란으로 빠져갔다. 최초 모둠에서 공부한 내용이 사람과 사람을 거치며 이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간 것이다. 하지만, 그 날 우리는 수업을 통해 비록 소설 작품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언어에 기초한 인간의 의사소통 방식이 얼마나 불완전한지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더 이상 수업은 '나'만의 수업이 아니다. 그리고 더 이상 실패는 교사 개인의 책임이 아니다. 연구시범학교 공개수업의 완벽하게 보여지는 수업은 오히려 완벽한 결손이다. 교사와 학생에게 수업은 삶이며 그것은 실패를 보장할 수 있을 때 완벽함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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