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소년이 온다'를 읽고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은 언제나 '김대중'이라는 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셨다(그때는 대통령이 되기 전이었으니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셨던 기억이 난다.). '아! 우리 김대중 선생님이 정치에 복귀하셨는데 잘하실 수 있을까?'라며 수업 진도는 안 나가고 정치 얘기만 하셨다.
속으로는 '수능 준비나 시키시지, 왜 누군지도 모르는 정치인 얘기만 하실까?'라고 생각했었다.
스무 살이 되어 대학에 입학하였다. 내가 속한 동아리가 '시 감상 및 창작'하는 동아리였는데 이름부터 특이한 '기형도'에 대해서 다루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폼나게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을 사서 읽어 보았다. 시집은 수능 공부 이후 처음 접하는 경험이었지만 역시 이해가 도통되지 않아서 방구석 한 켠으로 던져버렸다.
당시 대학생 친구들은 무언가를 위해 '데모'를 했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들이 그냥 멋으로 한다고 치부해 버리며 동참 요구를 뿌리치기 바빴다. 민주화가 훨씬 지난 90년대 후반인데 무엇을 위해 데모를 하는 것인지 도저히 납득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냥 연애를 하든 술을 마시든 공부를 하든 하면 되는 세상인데 무엇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찼는지 나는 미처 몰랐다.
97년 어느 가을날이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선생님이 얘기하셨던 '김대중'씨와 '이회창'씨가 대선을 앞두고 언론에 도배되던 해였던 걸로 기억한다. 대학교에서 읽었던 신문(한겨레)과 집에서 아버지가 받아보는 신문(조선일보)을 우연히 비교하며 대선 관련 기사들을 읽게 되었다. 같은 내용, 같은 사건을 다룬 대선 이야기인데 관점이나 비판점이 판이하게 달랐다.(심지어 지면에서의 비중도 달랐다.) 내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때부터 맹목적으로 믿었던 신문 및 방송에 대해 회의와 의심을 갖기 시작했다.
내가 외면했었던 학생운동을 하던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하며 '진실을 알고 싶으면 무엇을 읽어야 하느냐'라고 했다. 그랬더니 추천해 준 책이 '인물과 사상'이라는 잡지 성격의 책이었다. 일단 무작정 사서 읽었다. 그동안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던 인물들만 나왔다. '노무현', '강준만'이라는 분들도 이때 처음 알았다. '서울집중화 현상 비판', '지방 살리기 운동', 무엇보다도 '좌파'와 '우파'의 의미, 그리고 '진보'와 '보수'가 바라보는 세상의 차이를 뒤늦게나마 깨닫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 후로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교사가 되어 추자도에 초임발령이 났다. 교사 9명으로 이루어진 가족 같은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단, 정치 얘기만 빼고....... 어느 날 회식을 하는데 '조선일보' 얘기에 대한 찬양을 하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노무현'은 고졸이기에 대통령이 되면 안 된다고도 하였다. 갑자기 울컥한 마음이 들어, 나보다 20살이나 많은-심지어 그는 나를 제외하고 그중에서 가장 젊은 분 중 한 명이었다- 선생님에게 소리쳤다.
'어떻게 제주도민 전체 마음의 상처로 남아있는 4.3을 폭동이라며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신문을 찬양할 수 있느냐?!'
'교사로서 '고졸'이라는 사람을 그렇게 무시해도 되느냐? 교육자가 그런 학벌지상주의 마인드를 가져도 되는 거냐?!'
당돌한 막내의 외침에 순간 정적이 흘렀지만 아랑곳 안 하고 조선일보가 그래도 제일 신뢰가 가는 신문이라고 계속 주장했었던 기억만 남는다.
세월이 흘러 교사가 된 지 20년이 넘은 몇 해 전 어느 날 우리 반 여학생이 읽고 있는 책의 표지가 우연히 눈에 띄었다. 내가 20살 대학생 때 읽고자 시도했던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이었다.
"이야~ 나도 대학교 때 읽으려다가 접었던 책인데, 대단하구나!" 하며 반가운 마음에 잠시 읽었는데.... 그제야 시의 의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5.18을 제대로 몰랐던 것이었다.
또한 제주도민으로서 여전히 4.3을 잘 모른다는 고백도 해야 할 것 같다. 학창 시절에도 어쩌다 그 이름을 잠깐 들었을 뿐, 친구의 아버지가 4.3의 피해자라는 실토에 공감조차 못할 정도로 무지했다. 대학교에 와서도 내 관심사에서 멀어졌을 뿐 알려고 하지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에 대한 교육과 언론 및 정부의 입장은 당시만 해도 '폭동'으로 규정하며 은폐하고 축소하기에 바빴다는 상황도 있었지만-이후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정부의 잘못에 대한 인정과 사과를 했다- 시간이 흘러 그런 무지함은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이어졌을 뿐이다.
보이지 않았던 세계가 희미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했다. 작년에 출간한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와 '소년이 온다'를 연거푸 읽었다. 무지했던 나 자신에 대한 후회와 반성, 그리고 그들의 희생과 슬픔과 상처 위에 세워진 민주주의라는 가치, 민주주의가 주는 세계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제대로 느끼고자 읽었다.
2024년 12월의 계엄 사태는 다시 나의 이러한 초라하고 부끄러웠던 기억들을 상기시켜 주었다.
나의 철없던 어린 시절처럼 정부와 언론, 교육이 손을 잡고 세뇌시키는 것에 무비판적으로 살아왔다면 나는 여전히 촛불(응원봉)의 의미를 모르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겠지? 내가 살아갈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모르고 먼 훗날 그 어긋남조차 자각 못하고 살아가고 있었겠지?
현 정부가 벌인 엄청난 사태는 '다시 만나고 싶은 세계', '다시 만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염원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서울 광화문에서 잠시나마 그들과 함께 하며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따라 불렀다. 신나는 댄스 곡이 왜 이렇게 슬픈지 몰랐는데 이제 알 것 같다. 다시 만나고 싶은 세계에 대한 강력한 염원, 우리를 가둬놓고 못 보게 만들고 무지하게 만들었던 세상을 뒤집고 예전의 좋았던 세계를 갈망하는 우리의 외침에 눈물이 주르륵 볼을 따라 흘러 내렸다.
야광봉을 들고 목놓아 '다시 만난 세계'를 불렀던 그날은 교사로서 학생들이 나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깊어지는 밤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