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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Mar 21. 2024

영화에 취하고 인생에 취하고

영화 <어나더 라운드>(토마스 빈터베르그, 2020) 리뷰

본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매즈 미켈슨 주연의 영화 <어나더 라운드>는 한마디로 술을 부르는 영화입니다. 적적한 밤에 시청하기엔 주의를 요하는데, 그렇다고 낮에 보자니 어딘가 민숭민숭할 것도 같네요. 영화 속에 알코올의 해악에 대한 부분이 분명히 포함되어 있는데도 영화를 보고 나면 희한하게 술이 당깁니다. 아마도 오프닝과 엔딩, 두 장면에서의 ‘차고 넘치는 흥취’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젊음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꿈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꿈의 내용이다.


   영화는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의 말을 인용하면서 시작합니다. 젊음, 꿈, 사랑! 청춘을 연상시키는 단어들이 나열되더니, 실제로 한창 젊음을 만끽하는 이들이 화면에 등장합니다. 바로 청춘 남녀들의 호수 경주 장면입니다. 호수 경주란 덴마크 학생들의 술 파티 문화로 여럿이 팀을 나눠 호숫가를 달리면서 맥주를 궤짝으로 마시는 게임입니다. 당연히 과한 음주를 조장하지만, 청춘들에겐 그저 웃고 떠들고 취하는 왁자지껄한 축제죠. 한바탕 흥겨운 소동이 선을 넘을 듯 말 듯 위태롭게 이어질 때, ‘그래, 실컷 젊음을 낭비하려무나. 넘칠 때 낭비하는 건 죄가 아니라 미덕이다.’라고 했던 박완서 작가의 말이 스치듯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주인공은 따로 있습니다. ‘젊음, 꿈, 사랑’과 어쩐지 거리가 먼 듯한 중년의 남성들. 마르틴(매즈 미켈슨)과 그의 친구 4인방은 바로 앞에서 호수 경주를 즐겼던 고등학생들을 가르치는 역사, 체육, 음악, 심리학 교사입니다. 학생들의 무절제한 음주가 한껏 들뜬 분위기였다면, 이들의 술자리는 어쩐지 침울하기만 합니다. 일은 매너리즘에 빠졌고 일상은 권태로우며 가족은 족쇄가 된 지 오래입니다. 이들 중엔 이미 이혼한 사람도 있고 우울증이 의심되는 이도 있습니다. 어쩌다가 우리가 이렇게 됐을까, 알 수 없다는 게 더 문제죠.     


   

   그러던 차에 이들은 아주 흥미로운 이론을 접하게 됩니다. ‘인간은 혈중알코올농도 0.05%를 유지하면 적당히 창의적이고 활발해진다’라는 핀 스코르데루의 가설이 그것입니다. 먼저 마르틴이 시험 삼아 보드카를 마신 채 수업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수업은 이전과 다르게 무척 활기찬 분위기로 진행되죠. 언뜻 알코올이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이자, 마르틴과 친구들은 직접 가설을 실험해 보기로 합니다. 처음에 이들은 평일 낮 동안만 ‘약간 취해있는 상태(0.05%)’를 유지하며 직업적, 사회적 성과의 증거를 수집하기로 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실험은 성공적이고 가설은 맞는 것처럼 보였죠.     


   그러자 이들은 실험을 더 밀어붙이게 됩니다. 2단계는 각자의 적정 혈중알코올농도가 다를 수 있으니 찾아보자는 거였고, 3단계는 최대치로 높여서(만취 상태) 궁극의 카타르시스를 느껴보자 였죠. 결국 적당한 선에서 멈추지 못한 이들은 점점 술에 의존하게 되고 온갖 사고를 치게 됩니다. 그러다가 비극이 발생하죠. 네 명 중에서 특히 술에 취약했던 톰뮈가 학교에서 해고된 후 자살합니다. 친구들은 충격에 빠진 채 그의 장례를 치르고, 술에 대한 욕망도 이렇게 사그라드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이처럼 알코올 중독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걸로 마무리되었다면, 영화를 본 후 술 생각이 간절하다는 관객의 평은 없었겠죠. 영화도 지금처럼 성공하지 못했을 거고요.    

 

   이 영화의 매력은 엔딩 장면에 있습니다. 톰뮈의 죽음을 애도하는 친구들 앞에 이들이 가르쳤던 졸업생들을 태운 트럭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갑니다. 호수 경주가 학생들만의 축제였다면, 졸업은 학생과 교사 모두의 축제겠죠. 마르틴 일행은 항구에 모인 졸업생들 무리에 합류해서 다시금 한바탕 술을 마시고 춤을 춥니다. 특히 ‘What A Life’ OST에 맞춰 춤을 추는 매즈 미켈슨(마르틴 역)의 연기가 압권입니다. 슬픔의 정점에서 무아지경에 빠져 춤을 추는 그의 모습은 마치 인생이란 희비극이 섞여 있는 모순투성이이며 그 속에서 부대끼는 우리의 모습은 갈지자를 그리는 만취 상태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마르틴과 친구들이 욕망했던 건 술이 주는 쾌락이 아니라 청춘의 활기였는지도 모릅니다. 과거 젊었던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기에 이들의 욕망은 필시 좌절될 수밖에 없었겠죠. 그렇다고 인생의 흥겨움에서 영영 배제된 것이냐 하면 그건 아니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걸 내려놓고 한껏 술에 취하고, 음악에 취하고, 춤에 취하는 순간에는 누구나 청춘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마르틴이 강물인지 바다인지로 뛰어드는 마지막 장면에서 저는 ‘인생에 취한다’는 표현을 떠올리며 카타르시스를 느꼈습니다. 영화에 취하고 인생에 취하고. 


   아, 글이 마무리되어 가니 냉장고 속 차가운 맥주가 유혹합니다. 아무래도 혈중알코올농도 0.05% 실험에 동참해 볼까 합니다. 그러면 혹시 글이 더 잘 써지지 않을까요?          


<어나더 라운드>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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