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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메리카노 May 25. 2022

샌디훅 10년

계속 기도만 하는 미국

쾨벤하운에 이어 헬싱키를 거쳐 지난주 한국에 왔다. 헬싱키에서 별 다른 일정 없이 도시를 둘러보며 아메리카노 팟캐스트 새 에피소드를 녹음했다. 그러는 중에도 미국 경찰과 달라도 너무 다른 헬싱키 경찰, 너무 감동해서 두고두고 잊지 말아야지 다짐했던 헬싱키 중앙도서관 우디(Oodi) 도서관 등 글 쓸 소재는 잔뜩 발굴하고 왔다. 전쟁 때문에 러시아 영공을 둘러 가느라 7시간 반이면 올 거리를 11시간 반이나 걸려 돌아온 일, 한국에 와서 지방선거 벽보를 보고 느낀 일 등 계속 글감은 쌓이는데, 녹음해둔 팟캐스트 편집하느라, 시차 적응하느라 글을 못 쓰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또 가슴이 무너져내리는 뉴스가 날아들었다. 텍사스주 한 초등학교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했다. 지금까지 확인된 사망자는 어린이 19명, 선생님 1명, 그리고 현장에서 사살된 18세 범인까지 21명이다.

코네티컷주에 있는 샌디훅 초등학교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나 어린이와 선생님 26명이 목숨을 잃은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게 꼭 10년 전이다. 미국에 간 뒤 두 번째 맞는 내 생일에 벌어진 일이라 아직도 이가 덜덜 떨리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는 정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으니, 정신이 제대로 박힌 나라라면 이번 기회에 총기를 규제하겠구나 생각했다. 미국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온종일 감정선이 절망과 허무함, 무기력함, 분노 사이를 마구 왔다갔다 한다. NBA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스티브 커 감독이 경기 전 인터뷰에서 한 말이 딱 내 심정과 같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sIWMvOlpkxM

굳이 따로 번역하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는지 표정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최소한의 앞뒤 분간이 되는 미국인이라면 자기 나라의 치부가 또 한 번 드러난 데 대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오늘 하루 미국 친구들의 분노에 찬 소셜미디어 포스팅 가운데 눈에 띄는 것 몇 가지만 더 적어놓는다.

총기를 사려는 이들의 신원 조회 요건을 강화하는 법안을 표결에 부치는 대신 깊은 조의만 표하고 기도하는 편을 택한 자들은 비겁하고 비열한 악마일 뿐이다.

--> 현재 미국 상원에는 하원에서 통과한 총기 판매시 신원조회를 강화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총기 규제 법안이 계류 중이다. 공화당 소속 상원의원 50명은 이 법안을 표결에 부치는 것조차 반대하고 있다. 총기 규제를 못하는 책임은 결국 민주, 공화 양당 모두에 있긴 하겠지만, 확실히 한쪽이 더 끔찍하다. 너무 명백한 해법을 눈앞에 두고 기도만 하는 모습을 보면 참담하다. 미치 매코넬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 테드 크루즈를 비롯해 공화당 모든 상원의원이 애도의 뜻을 담아 성명을 냈다. 총기 규제를 강화하겠다는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샌디훅 이후 지난 10년 사이 뭐가 바뀌었나 곰곰히 따져봤더니, 딱 하나 바뀌었더라. 이제 미국 어린이들은 학교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할 때를 대비해 훈련을 받는다. 교탁 뒤나 사물함에 숨거나, 문을 엄폐물로 삼거나 비상구 위치를 숙지하고 도망치는 길을 익힌다. 이게 미국 사회가, 우리가 아이들에게 제시한 해법이다. 학교에 누군가 들어와 갑자기 총질을 해댈 수 있는데, 그때는 알아서 잘 피하고 살아남아야 한다.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게 정녕 이것밖에 없나?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아 코르테스 의원은 여성이 스스로의 건강을 위해 임신중절 여부를 결정할 권리는 정부가 제약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정작 미국 시민의 목숨을 훨씬 더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총기에 대해선 정부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외치는 광기에 가까운 모순을 지적했다.

어린이들이 학교에서 총에 맞아 죽고, 어르신들이 장 보러 갔다가 슈퍼마켓에서 총에 맞아 죽고, 교회에 기도 모임을 간 이들이 총에 맞아 죽고, 학대 피해자들이 시설에 모여 지내다 총에 맞아 죽고, 사람들이 많이 모인 데를 지나던 이들이 영문도 모른 채 총에 맞아 죽는다. 이런 끔찍한 일이 매일 벌어지는 걸 막기는커녕 방조하는 이들에게 생명을 위한다는 "pro-life"라는 이름을 붙이는 게 마땅한 일인가? 폭력을 향한 끔찍한 광기를 지금 당장 멈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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