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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atitudo Oct 10. 2021

흑역사를 통해 돌아보는 나의 인생

소르본 철학 수업 / 전진


자아란 우리 생각보다 훨씬 의존적이다. 개인을 규정하는 출신 학교 이름, 다니는 직장을 지워내기만 해도 혼란에 빠진다. 자기소개서로 개인을 요약하는 오늘날은 적어낼 공동체가 없으면 불안을 느낀다. 게다가 사회적 관계마저 지운다면 우리의 존재를 보증해주는 타인도 없는 셈이다. 누구의 친구, 누구의 자식이라고 소개할 수 없다면 '나'란 대체 누구일까? - 소르본 철학 수업 中

한국 에세이 자체도 오랜만에 읽어보지만, 책 내용에 푹 빠져서 시도 때도 없이 읽고 싶어지는 책을 만나게 된 것도 참 오랜만이다. 


'소르본 철학 수업'의 저자 전진 님은 심상치 않은 인물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떠난 것도 그렇고, 성인이 되었을 때 '전민지'에서 '전진'으로 스스로 이름을 개명했다. 어릴 적 친구들이 송 씨라서 송아지라고 놀렸을 때 빼고는 아버지가 지어주신 내 이름에 만족하며 살았고 현재도 그렇다. 하지만 앞으로 살아갈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정해서 개명하는 것도 꽤 멋진 일인 것 같다. 


책의 내용은 프랑스에서 철학을 공부하기 위한 준비 과정, 어쩌다 이런 선택을 했는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작가가 사유하고 배운 내용들이 정리되어 있다. 공감되는 내용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언어에 대한 내용이다. 

화자로서 평등한 불어 체계 또한 내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대화 상대에 따라 '나는'과 '저는'을 오가는 한국어의 위계질서가 없었던 덕일까. 프랑스어로 말하는 '나'는 언제나 'Je'로 시작한다. 물론 상대방을 친구처럼 'Tu'라고 부를지, 예의 바르게 'Vou'라고 존칭 할지 고민해봐야 한다. 하지만 말하는 주제는 언제나 'Je'다. 그렇기에 화자는 자기 자신을 낮추지 않고서도 상대방을 높여 부를 수 있다. 내 자리를 굳건히 지키면서도 상대방을 존중할 수 있다는 귀한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 소르본 철학 수업 中

아무래도 철학은 본인이 사유한 것을 말과 글로 풀어내는 학문이기 때문에 다른 과목들보다 언어를 더 잘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언어 공부하면서 느낀 어려움, 깨달음, 목표로 했던 불어 시험 끝판왕 C2를 합격했을 때의 좋으면서 허망한 감정들이 자세히 표현되어 있다. 독일과 베트남에서 생활하며 언어의 장벽으로 절망감을 꽤나 느껴본 나도 많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참신하다고 느꼈던 부분은 C2를 취득한 후 과거의 공부로 힘들어하던 자신에게 편지를 쓴 내용이다. 보통은 미래의 나에게 편지를 보내며 목표를 정립하고 앞으로 더 열심히 살아가겠다며 다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저자는 C2를 취득하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일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언어 공부는 내가 가진 목표의 수단이 되어야지 그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배워 과거에 언어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받아하던 자신에게 편지를 쓰며 나중에라도 위로를 해준 것이다. 


이 책을 보니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가 떠올랐다. 인생의 순간순간을 보면 파동도 크고 굴곡이 많은 것 같지만 나의 전체 인생 흐름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사실은 잔잔한 파도와도 같다. 마치 주식 월봉 그래프의 잔잔한 부분을 확대한 일봉 그래프를 보면 파동이 마구 커지는 것처럼. 그래서 주어진 고난에 일희일비하기보다는 멀리서 바라보면 어려움들도 잔잔한 파도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내가 배우고 얻어갈 점이 무엇인지에 집중하는 게 개인 성장에 더 도움이 되는 것이다. 


저자도 어릴 때부터 인생에서 참 많은 굴곡이 있었다. 초등학생 시절 당한 성추행, 7표 차로 떨어진 고등학교 학생회장 선거, 사람들에게 사랑을 얻고 싶어 만든 마초맨 영상, 국정원 시계를 얻기 위해 스스로를 속여 가며 써낸 글, 유학비를 벌기 위해 몸 담았던 유흥가 등. 


사람에 따라 누군가는 흑역사라고 숨기고 싶은 일이 될 수도 있고 제일 친한 친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 같은 이야기들을 너무도 담담한 문체로 담아내고 있다. 마치 과거의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 사유하며 스스로 치유해나가는 과정을 보는 것만 같았다. 


심리학을 전공했다고 하면 만나는 사람들 열에 아홉은 '그럼 사람 심리에 대해 잘 아시겠네요?'라고 물어본다. 하지만 나는 심리학을 공부하며 다른 사람을 파악하기보다는 나도 몰랐던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상적으로 만들고 싶은 자아상과 실제의 나를 구분하는 법을 배웠으며, 떳떳하지 않은 내 성격의 어두운 부분에 대해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게 해 준 시간들이었다. '소르본 철학 수업'의 저자도 오랜 옛날 사람들이 쓴 철학서들을 공부하며 내가 심리학을 공부했을 때와 비슷한 시간들을 보낸 것 같아 동질감이 느껴졌다. 


스스로에 대한 과장이나 눈속임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든 부분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배우고 성장하며 살아가는 저자의 모습이 너무 멋있게 느껴졌던 책이다. 기회가 된다면 식사를 대접하며 같이 대화를 해보고픈 사람. 앞으로도 많은 책들을 내주셨으면 좋겠다. 


Photo by Diogo Fagunde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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