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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이리 Jun 03. 2020

어떤 게 엑셀이고, 브레이크야?

미스 제주댁 이야기│#제주살이 #장롱면허 #초보운전


“어떤 게 엑셀이고, 어떤 게 브레이크야?” 운전대를 잡고 그에게 물은 첫 번째 질문이다. 맙소사. 처음 운전학원을 다니던 고3 때로 돌아간 듯, 모든 것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내가 몰아보았던 차는 옛날의 코란도. 그 아이로 말할 것 같으면 엑셀에 힘을 실어 꾸욱 눌러야 서서히 속력이 붙는 침착하고 점잖은 아이였고, 차체가 높아 낮은 차체에서는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시원하게 보여주던 마음이 넓은 아이였다. 하지만 그의 차는 낮은 차체의 아반떼. 요즘 나오는 차들은 섬세하고 예민해 엑셀을 살짝만 눌러도 붕! 하고 앞으로 나가버린다고 익히 들어왔기에. 더욱 낯설었고, 운전대를 잡는 것이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마지막으로 운전했던 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첫 번째 회사를 다닐 때였으니, 거의 10년 만이다. 차에 대한 욕심, 운전에 대한 미련은 없는 듯해도 나에겐 버리지 못한 로망이 하나 있다. 늦은 시간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술 한 잔 걸친 남편을 내가 데리러 가는 이상한 로망. 그런 것이 왜 그리 멋져 보이는지. 어찌 되었건 운전을 할 줄은 알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틈날 때마다 그에게 연수를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때때로 장난처럼 대신 내가 운전하겠다며 자신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었다. 장난처럼 나누던 나의 드라이버 복귀는 제주행 배편을 타러 완도 여객 터미널로 향하는 길에 현실이 되어갔다. 서울에서 완도까지 꼬박 5시간을 운전해야 하는 그를 보며, 내가 운전을 할 수 있다면 좋았을걸. 운을 떼면서부터 화제는 운전으로 바뀌었고 그렇게 한참 동안 이어진 이야기가 끝날 무렵, 나는 그의 굳은 의지를 보았다. “제주에서는 꼭 연수해보자 우리!”


면허를 딴 지는 꽤 오래되었다. 열아홉 살의 12월 24일. 십 대의 마지막 크리스마스이브 날, 운전면허증은 선물처럼 나에게 왔다. 학원의 노란 자동차로 선생님과 함께했던 도로주행을 제외하고, 직접 차를 몰아본 건 그로부터 약 3년의 시간이 지나 대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학교와 집을 오가는 등하교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처음 운전대를 잡은 순간, 느낌이 왔다. 자동차와 친해지려면 꽤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할 것 같다는 묘하고도 싸한 느낌이.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들이 나에게서 많이 빠져있음을 이미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차 없이 도보로 다닐 때도 길치, 방향치로 유명했는데 운전을 하면서 그 증세가 내가 인지하고 있던 것보다 꽤 심각함을 다시금 깨달았다. 거리감이 없다는 것은 운전을 하며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다. 무엇보다 천생 겁보, 왕쫄보인 나에게는 대담함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거북이 운전의 대가로 거듭날 싹이 보였달까.


이러한 이유로 운전을 하는 동안 주변의 걱정을 한 몸에 받았지만, 한 학기 동안 별다른 일없이 곧잘 운전하며 다녔다. 사람 많고 복잡한 주말에 차를 끌고 시내도 나가보고 혼자 고속도로를 타고 울산으로 넘어가 친구를 만나고 오기도 했으니. 엄청나게 잘하진 않아도 이 정도면 되었다고 스스로에게 만족하던 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고는 갑자기 생각지도 못하게 일어났다. 그것도 연이은 두 번의 사고. 첫 번째는 바뀐 차선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탓에 내 차의 뒷구리를 박고서 혼자였던 나를 선처해주듯 궁지로 몰아넣은 아저씨와 그의 딸. 두 번째 사고는 질주본능으로 무장한 차들이 가득한 대학교 앞 도로에서 벌어졌다. 절대 멈출 생각이 없는 듯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두 대의 차를 급하게 피하려다 멈춰서 있는 버스의 뒤통수를 쿵 박아버린 사건. 다행히 운전을 종료한 버스였고 박은 부분이 살짝 안으로 들어간 정도로 그리 큰 사고는 아니었다. 지난 사고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때라 잔뜩 겁을 먹고 펑펑 우는 나를 도리어 달래주시던 버스기사 아저씨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게 나는 운전대와 이별을 선언했고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버렸다.


제주는 새롭게 시작하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평일 낮 시간에는 차가 많이 다니지 않는 외딴 도로가 대부분인 섬. 구불구불하고 복잡한 서울의 도로와는 다르게 일직선으로 쭉쭉 뻗어있는 도로가 많다는 것도 큰 장점이었다. 육지에서는 거북이 운전을 할 경우 앞뒤 좌우로 무지막지한 막말들이 쏟아져 욕받이가 될 것이 분명하지만, 제주에는 제한속도가 40~60km인 곳도 꽤나 있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러한 이유로 섬에서 생활하는 틈틈이 그는 나에게 운전석을 내어주려 했다. “여기 정도면 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한번 운전해볼래?” 자신의 목숨과 그의 차를 미덥지 않은 나에게 맡겨보겠다는 큰 결심을 한 그. 머뭇거리는 건 도리어 내 쪽이었다. 내겐 마음의 준비를 할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다. 다시 운전대를 잡으려니 또 옛날 사고 때의 기억이 떠올라 덜컥 겁이 난 탓이다.


선뜻 나서지 못하고 머뭇거리고만 있던 어느 날, 그에게서 또 한 번의 제안을 받았다. 성산에 위치한 우리의 단골 카페에서 집으로 돌아가려는 길이었다. “여기는 어때? 여긴 정말 괜찮지 않을까?” 우리가 차를 주차해둔 곳은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오피스텔 옆 드넓은 자갈 공터. 한 대의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었지만 그것이 딱히 문제 되지 않을 만큼 넓고 탁 트인 공간이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자신이 없어 또 한 발 뒤로 물러서고 싶었지만 문득, 지금이 아니면 앞으로도 영영 용기를 내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래 좋아! 해보자!”





용기를 내어 시동을 켰다. 이제 진짜 시작이다. 심호흡 한번, 후-. 브레이크를 밟은 채로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린 뒤 기어를 D에 맞추었다. 앞으로 나가기 직전, 심호흡 크게 또 한 번, 후-. 서서히 발을 떼어보았다. 내가 운전대를 잡고 있는 차가 앞으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잊고 있던 운전의 감각이 깨어나는 듯했다. 내가 차를 움직이고 있다니. 세상에. 엄청 겁나고 무섭기만 할 것 같았는데, 웬걸. 엄청 신나잖아! “이것 봐! 나도 운전하면 잘할 수 있다고 했지?” 엄청난 것을 해낸 것 마냥 한껏 흥이 올라 얼굴에 미소를 한가득 띠고 있는 그때, 보조석에서 들려오는 차분한 그의 목소리. “지금 속도 10인 거 알지? 엑셀 조금 더 밟아볼까?”


내가 낼 수 있는 최대의 속도였다. 오랜만에 하는 운전이라 잔뜩 긴장한 탓에 나에게는 80km 정도의 속도로 나아가고 있는 듯 빠르게 느껴졌다. 고작 속도 10km로 겨우 공터 한 바퀴 돌아본 것이 전부였지만,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이제 영원히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포기해버렸던 일에 용기 내어 도전했다는 것만으로도 스스로가 그렇게나 뿌듯하고 기특할 수 없었다. 갈 길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많이 남았지만 그래도 첫 발을 떼었고 이렇게 조금씩 나아가면 되는 거니까. 내게 속도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10년 만에 운전대를 잡았고 이제 엑셀과 브레이크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성공적인 시작이었다.




< 달이라도 좋아요 미스 제주댁>  브런치에서 ·사진으로, 유튜브에서영상으로 제작됩니다. 영상이 궁금하시다면 놀러오세요 :-> https://youtu.be/i7iXoxWKBx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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