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이리 Jun 08. 2020

언제나 그랬듯, 시작은 좋았다

미스 제주댁 이야기 | #제주살이 #다이어트 #올레길걷기



제주에서 온 첫날, 우리는 다이어트를 결심했다. 매년 스스로에게 동기부여를 하고자 연간 행사처럼 잡아둔 나의 바디 프로필 촬영이 두 달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어차피 한 달의 제주 살이를 하는 동안 올레길 완주를 목표로 계속 걸을 것이기에 이왕 이렇게 된 거 나 혼자가 아닌, 둘이 같이 체중 감량을 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섬에서 푹 쉬면서 마음도, 몸도 건강하게 만들어보자는 바람직한 생각이었다.





손으로 끄적끄적 기록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 종이 한 장을 꺼내어 제주에서 한 달 동안 할 것들을 쭉 나열했고 가장 첫 번째에 우리의 다이어트 목표치를 적어두었다. 무엇이든 시작할 때의 열정과 패기만큼은 국가대표급인 그와 나. 체중 감량을 다짐한 날 몸무게를 측정해 그는 10kg, 나는 6kg의 감량을 선언했다. 늘 다이어트를 달고 사는 나(feat. 요요), 평소 꾸준하게 운동하면서 하루 한 끼는 균형 잡힌 식단을 지켜오던 그, 피트니스 대회 준비와 같은 확실한 목표가 있을 때에는 여행을 가서도 운동과 식단을 함께했던 우리이니까. 올레길을 걷기 시작하면 하루에 20km 정도의 거리를 걸을 테고, 그렇게 스물여섯 번이면(총 26개 코스인 제주 올레길) 엄청난 운동량일 테니. 높은 목표치이긴 했지만, 우리이기에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출발은 좋았다. 분명한 목표, 굳건한 의지, 해내고야 말겠다는 열정에 할 수 있다는 믿음까지. 완벽했다. 하지만 다이어트는 언제나 그렇듯, 쉽지 않았고 어느덧 제주 한 달 살이의 끝자락까지 와버린 우리는 첫날 측정해두었던 몸무게에서 1kg 증량과 감량 그 어디쯤을 매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한 달을 목표로 했던 우리의 다이어트는 실패했다. 하루에 3-5시간씩 걸으면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새나라의 어른이 생활을 하니까,  엄청 많이 빠졌겠다!” 지인들로부터 많이 듣는 말이다. 섬에서 지내는 동안 올레길 걷기를 꾸준히 하고 있기 때문에 운동량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다이어트가 아닌 유지어트가 되어버린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원인 없는 결과란 없으니까. 





둘이 함께 있을 때 더욱 시너지를 발휘하는 이 죽일 놈의 식욕이 늘 문제의 선두에 있었다. 태생부터 먹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먹는 복까지 타고난 터라, 혼자 있어도 식욕을 절제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때문에 늘 조금씩이라도 관리하지 않으면 금세 몸집이 커져버리고 만다. 그런 내가 그를 만나면 기분이 좋아서인지 없던 입맛도 살아나는 듯했고, 함께 맛있는 것을 먹는 행복에 취해 “맛있으면 0kcal!”를 외치며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절제력을 상실했다. 평소 운동을 즐기고 관리를 소홀히 하지 않는 그도 나를 만나면 식욕이 폭발해버리는 건 마찬가지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면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하는 그와 나. 환상의 티키타카를 자랑하는 우리는(매거진의 'B급 티키타카, 놓치지 않을 거예요' 글 참고) 음식을 사랑하고 먹는 행복을 즐기는 취향 역시 찰떡궁합이었다. 이런 우리가 제주 살이를 시작하면서부터 매시간을 함께 보내는 데다, 아침 일찍부터 올레길을 걸으며 엄청난 운동량을 소화하고 있으니. 부쩍 늘어난 식욕을 합리화하기에 얼마나 좋은 환경인가. “먹는 것까지가 운동 이랬어. 운동 후에는 더 잘 먹어야 해”라며 음식 앞에 대동 단결하여 매 끼니를 생애 마지막 만찬처럼 양껏 즐겼다. 한 달 동안 먹은 것들을 생각해보면, 몸무게가 빠지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도리어 유지가 된 것이 신기할 정도랄까.



가득 차있던 제주 살이 첫 날의 맥주 박스(왼쪽) / 한 달 뒤 텅텅 비어버린 박스(오른쪽)



살이 빠질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큰 이유일지도.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는 깔끔한 마무리를 책임지는 든든한 친구이자 운동한 뒤에 만나면 더할 것 없이 좋은 친구, 바로 술이다. 우리는 같이 운동하고 함께 맛있는 걸 먹는 것만큼, 서로 마주 앉아 술 한잔 기울이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부어라 마셔라 들이붓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 날의 음식에 어울리는 주종을 선택하고 하루의 피로가 사르르 녹을 만큼 적당히 곁들여 먹는 재미가 꽤나 쏠쏠하다. 육지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함께 술을 마셨다면, 제주에 지내면서부터는 매일 저녁 식탁 위에 기본 세팅으로 술이 놓여있었다. 


음주를 위한 지출이 꽤 많았으리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렇지 않았다. 한 달 동안 만원 정도는 되려나? 감사하게도 제주 한 달 살이를 시작하기 전 주변 지인들로부터 다양한 종류, 많은 양의 주류들을 받게 되었고 그 아이들은 우리와 함께 차를 타고 섬으로 넘어왔다. 그 덕에 주류는 돈 걱정 없이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섬으로 가는 방법으로 비행기가 아닌 배에 차를 선적하기로 했다는 말에 선뜻 집에 있는 맥주 한 박스와 보드카 한 병을 내어준 친구. 평소 와인을 좋아하고 잘 아는 그가 집에 있는 와인셀러를 탈탈 털어 가져온 와인 한 박스. 그의 형님이 디자인한 그림으로 감싸져 있는 미니 소주 한 박스 등. 주종도 여러 가지인 데다 ‘한 달 동안 다 못 먹고 올 수도 있겠는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양이 꽤나 많았다. 


하지만 그 어려운 걸, 우리는 또 해내고야 말았다. 오늘은 뭐 먹지? 어떤 술을 같이 먹어볼까? 행복한 고민 속에 매일 저녁을 보내다 보니, 육지에서 제주로 올 때 가장 무게를 많이 차지했던 술은 한 달만에 싹- 다 사라져 버렸다. 그나마 아끼고 아껴둔 와인 2병만이 다음 숙소까지 함께 갈 수 있었다. 물론, 그마저도 두 달 살이를 시작한 지 일주일이 채 되기도 전에 사라지고 말았지만.





이러한 이유들로, 지난 한 달 동안 적어둔 목표치는 달성하지 못했고 몸뚱이는 점점 동글동글해지고 있었지만. 맛있는 음식 하나에 하루가 행복해지는 기분을 느끼고, 같이 맛있는 음식을 먹는 행복이 이렇게나 큰데. 이걸 어찌 포기하랴. 함께 올레길을 걸으며 열심히 운동하면서 걸은 만큼 맛있게 먹었는 걸. 무엇보다 그로 인해 내내 행복했으니, 그럼 된 거지. 인생  있나! 뻔뻔한 표정으로 한 마디를 내뱉고는 서로를 보며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우리에게는 또 다른 한 달이 기적처럼 생겼고 그 기간 동안 또 계속 올레길을 걸을 테니.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목표를 이루어나가면 되는 거다. 고로, 아직 우리의 다이어트는 끝나지 않았다. 한 달 전에 적어두었던 목표 감량 수치 위에 검은색 펜으로 줄 2개를 찍찍 그어두고 그 옆에 새로운 목표 수치를 써 내려갔다. 이번에도 분명한 목표, 굳건한 의지, 해내고야 말겠다는 열정에 할 수 있다는 믿음까지 갖추고서. 언제나 그랬듯, 시작은 좋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올레꾼이 추천하는 제주 올레길 카페 여섯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