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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이리 Jun 30. 2020

할까 말까 할 때는 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올레길 이야기 | #제주올레길걷기 #올레길6코스 #섶섬



오랜만에 늘어지게 잤다. 오전 9시에 일어나 글을 쓴 뒤 아침까지 챙겨 먹고는 잠시만 누워볼까 하는 찰나, 잠이 들어 그렇게 꼬박 2시간을 자버렸다. 일어났을 때는 이미 오후 12시. 전 날 새벽이 되어 잠든 탓에 늦잠을 잤음에도 눈꺼풀은 여전히 무거웠고 몸은 마음처럼 쉬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오늘은 걷지 말고 집에서 쉴까?'라는 그의 달콤한 유혹. '응!'이라는 대답이 목 끝까지 나왔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반드시 걸어야 하는 일도 아닌데. 하루 푹 쉬고 가벼운 몸 상태로 내일 걸어도 되지 않을까? 고민도 했다. 그렇지만 오늘 너무도 걷기 좋은 날씨인걸. 이런 날 걷지 않으면, 변덕스러운 제주의 날씨가 언제 또 비를 몰고 와 걷지 못하게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음, 할까 말까 할 때는 하는 것이 대부분 정답이었으니. 온몸을 기지개 켜듯 길게 쭉- 늘어뜨리고는 발 끝의 반동을 이용해 영차! 오후 한 시가 다 돼서야 어렵사리 시작한 하루였다.



쇠소깍



아직 달아나지 않은 피로 곰을 어깨와 다리에 한 마리씩 매달고 내디딘 걸음은 묵직했다. 시작 스탬프를 찍고 해가 쨍쨍한 산책로를 몸풀기하듯 걸어가 들어선 곳은 유명한 제주의 관광명소, 쇠소깍. 예로부터 우리 조상의 어업기지인 천연 어항으로서, 우돈 지명을 딴 '우소(쇠소)'에 하천의 하구 부분으로 바다와 만나는 곳을 일컫는 제주어 '깍'을 더해 쇠소깍이라 한다. 옛 조상들은 쇠소에 용이 산다고 하여 용소라 부르기도 했다. 하천의 하구와 바다가 만나는 깊은 계곡이라 그런 걸까. 바위 위에서 물을 내려다보고 있는 우거진 숲의 색이 비친 걸까. 쇠소깍의 물은 파란색인 듯 초록색에 가까운 참으로 오묘한 색을 띠고 있다.


시작 스탬프를 찍고 쇠소깍으로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쨍한 햇볕 탓에 정수리가 따가웠는데. 숲이 만들어주는 시원한 그늘 아래에서 투명한 녹색 강물을 바라보고 있으니, 금세 온몸의 열기가 가라앉고 심지어 급격한 온도 변화로 팔뚝에는 닭살이 돋았다. 양 팔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내려다본 물가에는 관광객들이 한가득이다. 연인이나 친구끼리 타는 나룻배(카약), 여러 사람이 함께 타는 전통 조각배인 테우가 쇠소깍을 누비는 풍경. 시원한 풍광 덕분인지, 신나게 쇠소깍을 누비는 사람들과 신명 나는 트롯을 들어서인지 온종일 따라다닐 것만 같았던 피로 곰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쇠소깍에서 이어지는 해안 산책로를 따라 하효항까지 걷는 길. 관광지 중심에서 아주 살짝만 벗어났을 뿐인데. 여행객들로 북적이던 풍경과 갖가지 소리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고요한 우리 둘만의 세상이 되었다. 사람이 가득 찬 거리 속에 내가 있는 것이 좋고, 많은 이들의 목소리와 음악이 쿵쾅대는 시끄러운 소리가 나에게 활력을 주던 때가 있었는데. 언제부터인지, 복잡한 곳에서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은 잠깐이면 충분했다. 이제는 사람이 많지 않은 자연에 둘러싸이는 것에 편안함을 느끼고 바다와 새, 풀들이 바람에 흩날리며 내는 소리들이 주는 안정감 속에서 힘을 얻는다. 쇠소깍을 지나며 하하호호 웃는 많은 이들의 모습을 보며 활력을 얻었고, 조용한 자연의 풍경들 속에서 평안과 안정까지 얻었으니. 올레길을 걷기를 시작하기에 이보다 완벽한 장소가 있을까. 


쇠소깍을 벗어나 구불구불하게 이어지는 길을 걷는다. 방파제가 길게 뻗어있는 하효항의 쪽빛 바닷물이 풀 숲 사이로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낸다. 햇볕이 바다 위에 쉴 새 없이 떨어지며 반짝이는 물결을 만들어내는 풍경. 넋을 놓고 감탄하며 1km쯤 걸었을까. 드디어, 저 멀리 바다 위에 둥둥 떠있는 작은 섶섬이 보인다.


제지기 오름 오르는 길
제지기 오름에서 내려다본 섶섬
보목포구에서 본 섶섬



제주 올레길 코스들 중 몇몇에는 걷는 내내 우리의 앞뒤 좌우에 자리하며 함께 걷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올레길 메이트가 존재한다. 1코스에 성산일출봉이 있다면, 6코스에는 섶섬이 그렇다. 섶섬은 숲섬 또는 삼도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섬 주위는 높이 50m의 깎아지른 듯한 주상절리가 형성되어 있다. 섶섬이 만드는 진 풍경을 보기 위해 꼭 올라야 할 곳은, 제지기 오름이다. 꽤나 큰 규모의 커피숍과 식당을 지나다 보면 2.8km 지점, 제지기 오름 입구에 닿는다. 아침부터 침대에서 미적대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기도 했고 정수리가 녹아버릴 것만 같은 뜨거운 햇볕 때문에 힘이 부치기도 해서 오름을 생략할까 고민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제지기 오름이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곳에서 내려다보이는 보목포구와 섬의 모습이 장관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고, 무엇보다 섶섬의 모습을 보고야 말았기에. 오름에 올라 더 멋진 섶섬의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제지기 오름은 우거진 풀들이 동굴을 만들어 낸 듯한 좁은 입구의 촘촘히 놓여 있는 목재계단으로 시작한다. 입구에 도착했을 뿐인데. 정상에 오르는 동안 얼마나 많은 벌레들이 눈 앞에 아른거릴지, 또 한 번의 계단 지옥이 시작되는 건 아닐지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 아찔했다. 상상 속의 아찔함은 현실의 한낮 햇볕과 만나 환장의 콤비를 만들어냈다. 생각보다 가파른 경사까지 더해졌지만, 또 생각보다 금세 정상에 닿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오름의 정상 한 편에는 섶섬과 보목포구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나무데크가 있다. 정상의 시원한 그늘을 책임지는 키 큰 나무 가지 사이사이로 앙증맞은 섶섬이 쏙 들어가 있는 모습이 프레임을 꽉 채우는 순간. 이 모습에 감탄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귀여운 듯 위엄 있고, 웅장하면서도 앙증맞은 섶섬은 에메랄드빛 바다 위에 창창한 초록의 풀숲으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이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면 계단 지옥과 날파리 무리, 강한 햇볕쯤은 조금 참고 올라올만하다며 똑같은 섶섬의 모습을 요리조리 어찌나 찍어댔던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제지기 오름의 정상은 물론 오름을 내려와 마주하는 보목포구에서도, 거북이 머리를 닮은 구두미 포구 해안길에서도 섶섬은 곁을 지키며 우리와 걸음을 함께했다. 귀여운 녀석 같으니.



칼호텔 내부 우회로에서 찍은 칼호텔(왼쪽) / 우회로의 일부(오른쪽)
칼호텔 우회로에서 소라의 성(중간 스탬프 간세)로 가는 길



친절한 6코스는 올레길 메이트, 섶섬이 사라져 힘이 빠질 때쯤 우회로를 선물했다. 제주올레 가이드북의 지도를 보며 다녔던 우리에게는 우회로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었는데. 보목 하수처리장을 지나 검은여 해안로가 끝나는 서귀포 칼호텔 입구로 가기 전, 철망에 붙어있는 우회로 안내판을 발견했다. 기존의 올레길인 험한 바닷길 대신, 칼호텔 내부 우회로를 따라갈 수 있는 길이었다. 강한 햇볕에 노출된 채로 8km가량을 걸어 체력이 많이 떨어진 터라, 우리는 안내에 따라 우회로를 걷기로 했다. 이 길의 경우, 초반의 숲길을 지나고 나면 그리스나 이탈리아와 같은 이국적인 분위기의 칼호텔 주변을 따라 정돈된 길이 이어진다. 소라의 성(중간 스탬프)을 지나고부터 정방폭포를 향해 계속되는 산책길은 야자나무와 열대식물들이 양 옆으로 줄지어 있고 나무 데크로 길을 단장해놓아 시간을 생각지 않고 천천히 여유로운 걸음을 걷게 하는 힘이 있었다. 꼭 올레길을 걷지 않더라도, 칼 호텔에 머물거나 정방폭포를 찾게 된다면 산책로로 선택해도 좋을 법한 아름다운 길이다.


어느새 코스 후반부인 정방폭포 안내소에 도착했다. 폭포수가 수직 절벽에서 곧바로 바다로 떨어지는 동양 유일의 폭포로 국자 지정문화재이자 제주의 대표 관광명소인 정방폭포. ‘아침 일찍부터 길을 걷기 시작했다면, 정방폭포도 보러 갔을 텐데. 아침에 왜 그리 늦장을 부린 걸까.’ 뒤늦은 후회였다. 우리가 정방폭포에 도착했을 때에도 충분히 입장은 가능했다. 하지만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었다. 보다 중요한 일 하나가 남아있었기에. 종점 스탬프를 찍는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서 500m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서귀포 매일올레시장. 우리는 더 늦기 전에 이곳에 꼭, 가야만 했다.


올레길 6코스를 걸은 날은 어버이 날로부터 이틀 전이었고 어버이날에 각자의 부모님을 찾아뵙지 못하는 대신, 제주 오메기떡을 주문해 집으로 보내드리기로 계획했기 때문이다. 섬에서 보내는 물건을 5월 8일에 딱 맞춰 집에 도착하게 하려면 늦어도 이틀 전에는 주문을 해놓아야만 하기에. 절대 미룰 수 없는 일이었다. 구경거리가 가득한 이중섭 문화거리도 빠르게 빠져나와 얼른 종점 스탬프를 찍고 시장으로 향했다. 미리 봐 둔 유명한 오메기 떡집으로 곧장 직진. 정성스레 송장을 작성하고 집까지 안전하게 배송해달라는 당부의 인사도 드리고 나니, 오늘의 할 일을 완전히 끝마친 듯 안심이 되었다. 완주 스탬프는 한참 전에 찍었지만 우리는 오메기떡 주문까지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완주의 기쁨을 만끽했다.


힘겹게 아침을 시작하고 피로가 덜 풀린 걸음으로 가지 말까, 하지 말까 하루에도 몇 번이나 선택의 기로에 섰는지 모른다. 그때마가 STOP이 아닌 GO를 선택하게 한 것은, 신비로운 색감을 가진 맑은 제주의 바다와 옆에서 때로는 숨어서 어쩌다 돌아보면 뒤에서 우리와 함께 걷던 귀여운 섶섬 때문이었다. 피곤이 가시지 않은 무거운 몸으로 언제 완주하나 싶었는데. 늘 그랬듯, 오늘도 자연의 풍경과 소리에 빠져 감탄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종점 스탬프를 찍고 있는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다. 더욱이 6코스 완주와 함께 부모님께 제주의 맛을 선물하기까지 했으니. 평소보다 두 배, 세 배는 더 기분이 좋았다. 하루를 꽉꽉 채워 알차게 보낸 것 같은 뿌듯함이랄까. 올레길 한 코스를 완주하고서 뿌듯함에서 오는 개운함과 상쾌함이 찌릿! 온몸에 퍼졌다.


오늘 그냥 집에 있었으면 어쩔 뻔했어.

역시, 걷길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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