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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이리 Jun 25. 2020

제가 네스프레소는 처음이라

미스 제주댁 이야기 │#제주살이 #커피머신 #일리머신파



아침 8시. 정신을 차릴 수 있는 진한 커피가 절실했다. 늘 마시던 카누 스틱을 여러 개 타서 마실까 하다, 네스프레소 머신으로 시선을 옮겼다. 처음 숙소에 왔을 때부터 구비되어있던 좋은 기계 중 하나였다. 이사를 한 지 보름이 지나도록 내가 먼저 네스프레소를 사용해보겠노라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뜬금없이. 오늘따라, 네스프레소여야 했다.


육지에서 자취하며 일리 커피머신만 써온 터라 네스프레소가 생소했지만, 쉬운 작동법이니 괜찮겠지. 아무리 내가 기계를 못 다루지만 이 정도는 하겠지. 나를 너무 믿어버렸다. 뚜껑을 살짝 열어보니 캡슐 모양의 빈 공간이 보였다. 모양에 맞춰 캡슐을 넣고 뚜껑을 힘껏 내리면 된댔어. 읏차! 어라? 왜 안 닫히지? 새 기계라 뻑뻑한가 보지 뭐. 기계가 보내오는 이상신호를 무시했다. 아예 들어가지 않았다거나, 캡슐이 빈 공간보다 위로 많이 올라와있었다면 잘못 넣었음을 알았을 테지만 내가 보기엔 분명, 캡슐이 잘 들어가 있었다. (내 기억엔 그랬다. 음... 잠에서 덜 깼을지도) 다시 한번 전완근이 부들부들 떨릴 만큼 힘을 주어 아래로 내렸다. 뿌직! 캡슐이 터지며 내는 소리였다.


"자기야, 뚜껑을 완전히 젖혀서 열어야 해." 내가 놀란만큼 그가 깜짝 놀라 알려주었다. 뚜껑을 반만 열었던 것이 문제가 되었나 보다. 그가 말해준 대로 완전히 뚜껑을 제쳐두고 다시 캡슐을 넣어봤다. 아까보다 더 깊숙이 기계 안으로 쏙 들어갔다. 아아 이렇게 돼야 하는 거구나? 드디어 커피를 마실 수 있겠다 했는데. 웬걸. 드르륵드르륵 엄청난 데시벨의 공사장 소리가 계속 나고 추출이 전혀 되지 않았다. 물도 충분히 채워놓았는데. 커피는커녕 물도 나오지 않은 채 기계가 미친 듯이 괴성을 질러대는 상황. 한 자리에서 왔다 갔다 어쩔 줄을 몰라 어리둥절하다, 그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자기야, 이거 고장 난 거 같아.."



조금 더 잠을 청하려 누워있던 그는 결국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고장이 났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빠르게 A/S 가능 기간과 비용을 알아보던 나와는 달리, 요리조리 기계를 살피는 그. 다시 한번 작동 버튼을 눌러 상황을 파악한 뒤, 캡슐을 꺼내 안 쪽을 살펴보고 인터넷 검색을 몇 차례 하는 듯하더니. "하..." 할많하않(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 느낌의 큰 숨을 길-게 내뱉었다. 평소 주고받는 대화에 빈틈이 없고 장난스러운 농담들로 조용할 틈이 없던 우리인데. 오랜만에 온 집에 적막이 흘렀다. 그의 표정은 어두웠고 나는 두 손을 단전에 모았다. 아주 공손히. 내 잘못을 내가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아무 말 없이 화장실로 가더니, 자신의 칫솔을 들고 나타났다. 기계의 어느 부분을 칫솔로 쓱싹쓱싹 한참을 문질렀다. 그리곤 캡슐 없이 물로만 추출. 우와! 고집 센 미운 네 살 아기처럼 괴성만 질러대던 기계가 갑자기 차분해졌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프로그램에서 말썽꾸러기가 조곤조곤 말 잘 듣는 착한 아이가 되면 이런 느낌이려나. 감동이었다. 괴성은 잠재웠지만, 계속된 추출에도 커피 찌꺼기가 끊임없이 물에 섞여 나왔다. 내가 캡슐을 잘못 넣은 줄도 모르고 뚜껑을 닫고 추출을 눌러버린 탓에 캡슐이 터지면서 속에 있는 찌꺼기가 추출하는 구멍을 막아버린 것이 문제였다. 그의 계속된 칫솔질로 막은 추출구가 뚫린 듯했지만 아직 찌꺼기가 끼여있는 모양이었다. 추출 또 추출. 맑은 물만 나올 때까지 추출구를 통해 물을 흘려 씻겨내는 작업인 듯했다.


"됐다!" 드디어, 찌꺼기 하나 섞이지 않은 맑은 물을 보았다. 그는 캡슐을 넣고 추출이 잘 되는 것까지 확인하고서야 환하게 웃어 보였다. 나는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평소 화를 잘 내지 않는 그가 혹시나 화가 났을까 걱정되는 마음이 네스프레소가 고장 난 것보다 조금 더 컸던 것이 사실이다. "으이그! 사고뭉치야!" 그가 내 머리에 장난스럽게 콩 때리는 시늉을 했다. 처음부터 쭉 죄인 모드로 쭈글이가 되어있던 나는 다시 한번 그에게 배꼽 인사를 하며 미안하다고 했다. 화가 났었냐고 묻는 나의 말에, 아니니까  눈치 보지 않아도 된다며 살포시 안아주었다. 하마터면 우리 숙소 보증금을 네스프레소 A/S 혹은 기기 교체로 모두 써버릴 뻔했기에. (진짜 하루 종일 우울할 뻔했다) 얼른 고쳐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고. 집중하다 보니 무표정이 되었나 보네? 하며. 그의 한쪽 손에 들려있는 시커멓게 벌어진 칫솔이 보였다. 내가 칫솔 좋은 걸로 사줄게요. 네스프레소가 처음이라, 미안해.


나는 천상 글을 써야 하는 팔자인 걸까. 이렇게 에피소드가 끊이지 않아서야. 에휴. 이제 고작 9시. 하루의 시작인데, 순간적으로 너무 신경을 많이 쓴 탓인지. 이제 올레길 걸으러 나가야 하는데, 벌써 하루를 다 써버린 것처럼 피곤이 몰려온다. 오늘은 정말 조심해야겠다. 아무래도 조짐이 좋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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