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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진 Mar 01. 2022

느긋한 사생활

덕수궁 연지

고궁에 들어서는 순간, 세상과 동떨어진다. 격렬한 바람 한가운데 잔잔한 기류를 유지하는 태풍의 눈이 이렇지 않을까? 소음으로 뒤덮인 도심 정 중앙에서, 뜻밖의 고요를 마주한다.

이상한 일이었다

덕수궁에 오간 세월이 짧지 않은데 이곳에 작은 연못, 연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는다.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을 통과하고 나면 매번 가장 크게 난 길로 직진을 했었다. 그것이 대다수의 사람들이 흐르는 방향이었으니까. 그렇게 한번 길을 익히고 나니, 올 때마다 지난번 걸었던 대로, 익숙한 루틴대로만 덕수궁을 둘러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한문을 넘어섰을 때 매번 향하던 방향이 아닌 오른쪽으로 살짝 꺾인 길이 보였다. 한번 가볼까? 하는 호기심으로 새로운 길에 들어섰을 때 아담한 연지가 눈에 들어왔다. 분명 이 자리를 오래 지키고 있었을 터인데, 그간 발견하지 못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낯익은 곳이니 으레 잘 알고 있다 여긴 공간, 하지만 알고 지낸 세월과 알고 있는 정도가 꼭 비례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 방식대로만 바라본 세계는 딱 나만큼의 크기로만 인식되어 왔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선택을 했을 때, 세계는 확장되었다.

어제도 안달복달했다

가능하면 '괜찮을까?'라고 묻는 입장보다는 '괜찮아'라고 다독이는 쪽에 서고 싶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 평화로운 조언자보다는 안달복달하며 조언을 구하는 입장에 놓이고 만다.  

타고난 마음이 작다. 그래서 커다란 불의에는 용기 있게 나서지 못하면서 작은 푸대접에는 예민하게 화가 난다. 사람들이 고작 그 정도,라고 여기는 것들에 가슴 가운데가 턱 하니 막혀 버린다.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은 늘 디테일이다.

퇴근길, 내가 타야 할 버스에 사람들이 몰려든다. 정류장 근처에 버스가 보이는 순간부터 어디에 정차할지 가늠해 보는 이들의 눈치 싸움이 시작되었다. 조금이라도 먼저 버스에 오르기 위해 교통 카드는 이미 손에 쥐었다.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함과 동시에 귀찮음과 피곤함이 몰려온다. 하지만 뛰어야 한다.

그러나 이미 나보다 빨리 버스 앞문에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포기를 선택하고 만다. 늘 이런 식이다. 애초에 경쟁에 자질이 없다. 붐비는 사람 속에 뛰어드느니, 늦은 귀가를 선택하고 만다. 뱅뱅 돌아가더라도 앉아서 갈 수 있는 버스를 몇 번이나 환승하며 예상보다 훨씬 늦게 집에 도착한다.  

많은 사람들이 타는 직통 버스에 악착같이 오르지 않는 성격이 문제일까? 싶어 진다. 그 만원 버스에 기어코 올라타는 사람이었다면, 조금 더 성공한 내가 될 수 있진 않았을까 생각한다.

사람들이 멈춰서 있다

연지의 주변, 그리고 덕수궁 안의 모든 사람들은 멈춰 있거나, 느리게 움직인다. 등나무 아래의 나무 벤치에, 카페테라스에, 곳곳에 생겨난 작은 그늘에서 가만히 쉬어 간다. 나는 연지의 가장자리에 놓인 돌 위에 걸터앉아 멍하니 물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다 가끔 고개를 돌려서 느긋한 사람들을 보는 것이 좋다. 그 서두르지 않는 풍경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이어폰을 귀에서 빼지 않는 편이지만, 이곳에서만큼은 귀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어울린다. 스스슥 사삭 나뭇잎들이 부딪히는 소리, 타박타박 흙으로 된 바닥을 밟는 소리, 낮게 들려오는 누군가의 웃음소리, 자연스러운 백색 소음까지 이 평화로움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분주한 소음으로 가득한 도시의 정중앙, 그 가운데에 적막한 요새가 있다. 사람들에게 품었던 적개심이 누그러든다. 경쟁자처럼만 보이던 이들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따스한 가을볕이 무심하게 반짝인다. 노력, 용기, 선택, 순서 그런 것들이 필요하지 않은 시간이다. 즐거운 고립이다.

*이 글은 빅이슈 260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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