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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티 Apr 14. 2016

우리의 민낯을 마주하다

연극 한국인의 초상

 2015년 연극계에서 유종의 미를 거둔 연극이 있다. 바로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다. 작년 연말에 열린 대한민국 연극대상에서 대상, 연출상 등 총 4관왕을 차지한 화제의 공연이었다. 이 작품을 연출한 연출가 고선웅이 국립극단과 두 번째 협업을 했다. 공동창작의 방식을 취한 연극 한국인의 초상이 바로 그 작품이다. 이 작품은 국립극단 소극장 판에서 2016년 3월 12일부터 3월 28일까지 한국 사회의 모습을 27개의 에피소드 안에 담아 90분 동안 무대에 올랐다.


  소극장 판의 무대는 직사각형 공간의 정 가운데 무대를 세면의 관객석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긴 가로로 되어 있는 극장의 양 끝에는 불상과 십자가가 대칭되어 있고 짧은 가로는 소주병 장식과 큰 거울이 대칭되어 있다. 회색의 바닥에 흰색으로 그려진 모양들은 도로처럼 보이기도 했고 보드게임판처럼 보이기도 했다. 관객이 없는 면에는 벽을 가득 차지하는 대형 아크릴이 있고 작품에서 마주하게 될 27가지의 에피소드들이 우습게 그려져 있었다.

 총 27가지 이야기로 장면이 구성된다. 프롤로그, 사람과 사람들, 약하고 욕하는 사회, 군대 후유증, 삐삐 생각, 등에 붙은 아이, 훈계 불가, 해고 카톡, 섹스리스와 원조, 묻지 마, 거대를 지향하는 수컷들, 강남 물, 성공한 인생, 심심치 않게 바리데기, 마마보이, 구시렁거리는 청춘, 중독, 도박판, 인력시장, 폐지와 폐륜, 얼굴의 재구성, 아이돌, 산탄총, 남과 여 노인들, 짤짤이 순례길, 사행 천국, 대리기사들, 에필로그. 연극 한국인의 초상은 초고속 인터넷 평균 속도 세계 1위, 학업 성취도 세계 2위, 경제 경쟁력 세계 3위라는 화려한 수치에 가려진 대한민국의 민낯을 여실히 드러냈다.    



관객들을 웃음 짓게 한 고선웅식 블랙코미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연령대는 매우 다양했다. 인형부터 한 인물로 생각해본다면 갓 태어난 아이부터 10대, 청년, 중장년, 노인들까지 등장했고 배우들은 어린 배우를 섭외하기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는지 청년 배우들부터 흰머리의 노인인 정재진 배우까지 나름의 노력을 기해 캐스팅했다. 이런 다양한 연령대의 배우들이 보여주는 한국의 민낯은 매우 심각하고 부끄러우며 어두운 것들이다.

 27가지의 이야기들 중 몇 가지 기억에 남는 게 있었다. 먼저 인상적인 것들을 얘기해보겠다. 공연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약하고 욕하는 사회 장면이 그것들 중 첫 번째이다. 거대한 아크릴 벽에는 십자가가 빛나고 있고 반대쪽 벽에는 반가사유상이 놓여있었다. 이 장면에서 여자 배우들은 반가사유상을 향해 열심히 절을 하고 남자 배우들은 그런 여자 배우들을 음흉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얼마나 아이러니한 조화인가. 다음으로 해고 카톡은 아이를 봐야만 하는 남자가 월차를 시도하자 면대면으로 통보하는 것이 아닌 스마트폰 메신저인 카카오톡으로 해고를 통보하는 장면이다. 일자리가 없어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에서 한낱 카카오톡으로 해고를 통보하는 것은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이에 대한 연장선으로 성공한 인생 장면을 들 수 있다. 배우들이 양쪽에 서 있고 두 명씩 무대 중앙으로 등장해 한 마디씩 하면 ‘너 성공했네’라고 말한다. 이들의 성공 기준은 매우 상대적인 것이다. 누군가가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연령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에피소드들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노래를 사용해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내게 한 장면들도 있었다. 대중들의 귀에 익은 영화 O.S.T나 가요들을 사용해 블랙코미디적 요소들을 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기에 재밌고 편안한 장면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인의 초상 속에 존재하는 한국인의 초상

 작품 속에 고선웅 연출이 일정한 부분은 의도하여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숨긴 것일까. 보면서 성차별적인 시선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거대를 지향하는 수컷들과 얼굴의 재구성 두 장면만 비교해보아도 그렇다. 거대를 지향하는 수컷들에 등장하는 남성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자신의 성기 크기가 작아 여자들이 만나주지 않는다던가 하는 별 시답지 않은 이유이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존재하긴 했다. 그러나 얼굴의 재구성에 등장하는 여자들에겐 이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천을 머리에 두르고 등장해 한 명씩 그 천을 풀며 서로 ‘예쁘다’라는 말만 남발하고는 가요 ‘내가 제일 잘 나가’에 맞춰 춤을 추었을 뿐이다. 그들이 어떤 사회적 시선을 받아 성형이란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선 그 어떤 설명도 없었다.   

 아이를 강남물에 보내는 이야기와 pc방에서 아이를 낳고 쓰레기통에 버리는 아이 엄마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강남물에 보내는 아이의 아버지는 구구절절 사연이 많았다. 아이를 버리는 본질에는 자신도 아이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고 일말의 가능성으로 아이가 누군가에게 구조되어야 살아남는 상황에 던져버리고는 그곳에 가면 아이를 잘 키워줄 거라는 변명만 해댔다. 반면에 아이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엄마의 이야기는 누가 보아도 게임 하기에 귀찮아서 아이를 버렸다고만 보였다. 그 어떤 깊이 있는 이유도 드러나지 않았다. 현대 사회에서 pc방에서 아이를 유기했다거나, 고등학교 화장실에서 갓 낳은 아이가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심심치 않게 발견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대조되는 상황을 만들어놓고 남성은 많은 이유들을 달아주었지만 여성은 그렇지 않았다. 앞의 이야기와 함께 이런 여성에 대한 불편한 시각들을 느끼게 한 것이 고선웅 연출의 의도된 표현이라면 극찬받을 일이 마땅하나 그렇게 느껴지지 않고 그 또한 한 명의 남성이라고만 인식되었다.    


과연 희망일까 절망일까

 26가지의 이야기들을 뒤로 하고 마지막엔 해보자는 말로 관객들에게 위로를 건네고자 한다. 대리운전기사들의 셔틀버스 안, 이들의 퇴근길을 함께하던 이 버스의 운전기사이자 이 작품에서 유일한 백발의 노인인 정재진 배우가 일어나서 수벽 치기를 하며 “해 봐. 해보라고.”라는 말을 건넨다. 한 여배우가 먼저 수벽 치기를 시작하자 “예쁘다”라고 하기도 하며 계속해서 다른 인물들에게 유도하자 어느 새인가 모든 배우들은 수벽 치기를 한다. 이후엔 반가사유상이 보이는 곳에서 반가사유상과 비슷한 자세를 한 채 “다 나무 같아”라는 말을 하면 한쪽 벽에 있던 장치들이 올라가 창문이 드러나고 빛이 극장 안으로 들어온다.

 마지막 에필로그를 보고 위로받았다고 한 사람들이 있다. 앞서 언급한 절망들 속에서도 한 줄기 희망을 본다는 것이다. 연출인 고선웅도 이 장면을 두고 “한국인들의 평화를 얻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태평스러워지자, 그리고 뭐든 좋게 보자는 이야기죠.”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결말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한낱 어설픈 위로라는 것이다. 이미 많은 것을 해야만 도태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이 사회에서 도대체 우리가 얼마나 뭘 더 해야 하는 것인가, 무언가 할 수 있는 상황이긴 한 것이며 결국엔 개인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인 것인가 라고 반문하며 분노를 표했다. 이미 힘든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런 식의 위로는 위로가 아닌 절망으로 다가오고 잔인하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연극 한국인의 초상에서도 기존에 다른 작품들에서 봐왔던 고선웅 연출 식의 재기 발랄함이 극 내내 웃음을 유발했음은 분명하다. 참으로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많아 감탄하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선웅 연출이 얄미워졌다. 연출이 정말로 관객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했다면 이와 같은 불합리한 현상을 만들 자들을 비판하는 메시지를 담아 관객들에게 속 시원함을 던졌어야 한다. 고선웅 연출은 우리 사회에 가장 중요한 단면들에 대해선 언급조차 하지 않았고, 오히려 피해자들에게 해(do) 보든지 해(sun)를 보라는 말만 남겨버렸다. 그동안의 고선웅 연출의 작품을 좋아했던 나 또한 피해자들에게 희망을 가지라는 메시지를 던지기보다는 상황을 타파하기 위한 핵심적인 비판을 남겼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생각에 어느 순간 분노를 표한 사람들에게 동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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