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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il Aug 26. 2020

달키의 작은 독립서점(?)

2019.12.02 아일랜드 마지막 날

 달키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간 곳은 크리스마스 엽서를 밖에 잔뜩 내건 작은 서점이었다. 벽면과 곳곳에는 엽서가 가득했고 책보다는 다이어리, 노트들이 많아 문구점 같기도 했다. 엽서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는 두 아주머니 분이 계셨다. 주인에게 의견을 물어가며, 예쁜 엽서를 고르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고심 끝에 고른 엽서에, 정성스러운 마음까지 담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참 기분이 좋을 것만 같았다. (선물도 받을 테니까!) 그렇게 아주머니들은 엽서를, 나는 책을 구경했다.


 독립서점 같다는 생각을 한 것은, 주류의 책보다는 비주류의 책이 많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큰 서점에서는 보지 못한 책들이었고, 서점 주인의 섬세한 손길이 느껴지는 분류였다. 사람들이 각자 자기 자신, 그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에 몰입할 수 있게 해주는 책들이 많았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책은 movie quiz book이었는데,  내가 영화광이 아니라는 사실이 아쉬울 정도로 부러운 책이었다. 진짜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24시간 내내 이 책만 붙잡고 있어도 시간 가는 줄 모를 것 같았다. 어디 빵에 대해 써놓은 책은 없나..눈알을 열심히 굴렸다. 독특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책들이었지만, 사실 굳이 독특하게 여겨질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이게 다 우리 각자의 모습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런 우리의 모습을 더 열심히 들여다볼 수 있는 사회야말로 건강한 사회이고. 따라서 섬세한 책들의 접근성이 더 좋아져야 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닐까? 그래서 나는 독립서점이 좋다.

 이렇게 책구경이 끝나가는데도, 아주머니들은 아직도 엽서를 한 장 한 장 고르고 있었다. 갑자기 나도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카드라는 것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럽에 왔으니, 나도 유럽의 법을 따라 크리스마스를 챙겨보기로 한 것이다. 카드가 너무 많아서, 오랜 시간 고민하는 아주머니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부모님, 친구, 연인, 선생님 등 각각의 상황에 맞는 엽서들도 있었고, 크리스마스 냄새가 물씬 풍기는 엽서들도 있었다. 동글동글한 것을 좋아하는 나는 고민 끝에 눈사람과 루돌프가 있는 귀여운 엽서 세트(10장)를 골랐다. 두 개를 사면 할인해준다고 하길래, 또 다른 눈사람이 있는 엽서 세트도 골랐다. 총 20장의 엽서를 샀다. 예상하지 못한 지출이었으나, 마지막 날이었고 돈도 나름대로 아껴 써왔으니 엽서를 흔쾌히 사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카운터로 가기 전, 내 눈을 사로잡은 다이어리가 하나 있었다.


 I try to stay in shape... but sometimes I think to myself... round IS a shape

 그치, round도 shape이지. 아, 이 캐릭터 마인드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귀엽고, 유쾌하고! 다이어리 중간에 적힌 카툰 하나하나가 다 마음에 들었다. 다이어리는 손안에 들어올 정도로 작았고 매우 얇았다. 이런 다이어리는 써본 적이 없었는데, 사고 싶었다. 불현듯, 용도도 떠올랐다. 메인 다이어리는 한국에 돌아가서 친구와 사고, 얘는 내 하루 일상에 '제목'을 붙여서 기록하는 용도로 써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하루하루에도 기억될만한, 혹은 잊고 싶지 않은 이벤트들이 있으니 제목을 붙여주고 싶었고, 나중에는 책의 목차처럼 활용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종종 예전의 다이어리들을 보며 시간을 보낸다. 그럴 때, 먼저 이 작은 다이어리를 보면, 메인 다이어리 속 가장 궁금한 날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모든 게 소비를 합리하기 위한 논증 과정이었다.)


 카드를 샀으니, 다이어리를 사지 말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사지 않으면, 나중에 집에 가서, 한국에 가서 분명 아른아른 거릴 것 같았다. 마지막이기도 하고! 그럼 사야지! 막판에 이 다이어리까지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후기


 한참 지나고 글을 쓰는 지금, 엽서는 내가 지불한 금액 이상의 가치를 톡톡히 발휘했고, 다이어리는 그 가치를 현재에도 발휘하는 중이다.


 소중한 사람들 20명을 추리고 추려서 엽서는 모두 소진되었다. 나를 위한 엽서 한 장도 물론 남겨두었다. 그리고 우리 집은 내가 성인이 되어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선물+카드를 서로 주고받는 이벤트를 진행했다. 올해도 진행할 예정이다. 엽서를 쓰는 내내, 생일, 특별한 경사가 아니라도 또 축하할만한 일이 있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연말을 마무리하는 느낌도 들었고. 별 것 아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도 아일랜드에서의 나의 좋은 기억, 행복했던 감정들이 전달되었기를.


 다이어리는 불현듯 스친 용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아주 잘 쓰고 있다. 먼 타국에서 사 온 다이어리라서 더 특별하다. 메인 다이어리도 너무 마음에 들고. 2019년부터 2020년 다이어리를 열심히 고민한 보람이 있다. 1년을 나와 함께할 동반자인 만큼, 다이어리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것이 맞다. 두 개의 다이어리가 겹쳐져서 두 손에 꼭 들어올 때, 빈틈없이 행복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 다이어리 덕분에 하루하루가 특별해지는 것 같다. '제목'을 붙이기 위해서라도 의미를 찾게 된다. 벌써 내년에도 이 다이어리를 살까 고민이 된다. (유투버들이 다이어리가 여러 개인 이유가 조금씩 이해 가기 시작했다. 나는 몇 개로 불어날까? 나도 모르는 나의 확장 가능성이 무섭다.)


  구매 당시에도, 결과적으로도 좋은 소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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