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그런 영상 하나쯤 있지 않나. 유튜브 알고리즘이 보여주는 수많은 콘텐츠 중 왜인지 지나치지 못하고 매번 클릭하게 되는 마성의 영상 말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2013년 JTBC 드라마 <꽃들의 전쟁> 속 ‘화과자’ 장면이 추천 영상으로 뜨는 날이면, 홀린 듯 20분 넘는 시간을 빼앗기고 만다.
<꽃들의 전쟁>은 조선 후기 인조의 후궁인 소용 조씨(김현주 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궁중 암투를 다룬 드라마다. 소용 조씨를 비롯한 후궁들은 왕의 총애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한다. 이들은 온갖 음해와 모략을 서슴지 않는데, 17세기 조선이 배경인 드라마에서 난데없이 일본 전통과자가 등장하는 것도 소용 조씨의 모략 때문이다. 조씨는 세도가인 친정을 통해 독이 든 화과자를 궁에 들여와 라이벌 후궁들에게 선물한다. 승은 상궁 이씨(연미주 분)은 조씨의 갑작스러운 호의를 의심하지만 곧 화과자의 달콤함에 넘어간다. “어찌 이리 달고 맛있을꼬.” 감탄을 연발하며 한 상자를 모두 비운 그는 결국 유산을 하고 만다.
먹기 아까울 만큼 예쁘고 달콤한 화과자라니. 앙숙이 준 것이라 한들 먹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적어도 나에게는 없다. 내가 화과자 영상을 절대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까닭은 나도 그 맛을 아주 잘 알기 때문이다.
일본 유학 시절 1~2주일에 한 번씩 열린 차도(茶道) 교실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 중 하나였다. 외국인 유학생을 대상으로 한 이 수업은 다도 사범인 하야시 선생님의 주도로 이뤄졌다. 하야시 선생님은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중년 여성으로 언제나 새하얗게 분을 바른 얼굴에 곱게 틀어올린 머리, 정갈한 기모노 차림으로 우리를 맞아주셨다. 보폭이 좁은 전통적인 일본 여성의 걸음걸이를 하면서도 스포츠유틸리티차(SUV)를 끌고 나타나 우리를 픽업하는 그 갭에서 특유의 멋짐이 폭발한달까.
수업은 한적한 교외에 위치한 선생님 자택의 다도실에서 진행됐다. 다다미로 꾸며진 이 방에는 다른 가구 없이 오직 찻물을 끓이기 위한 화로와 커다란 솥이 걸려있을 뿐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다도 예법은 전부 잊어버렸지만 그 엄격함 만은 기억한다. 다도실에 들어가는 순서, 특정 자리까지 도달해야 하는 걸음의 수, 차를 건네 받을 때 감사를 표하는 방법, 찻잔을 돌리는 방향과 횟수, 찻잔을 감상하고 칭찬하는 방법 등 외워야 할 행동 양식이 수십가지였다. 열 번이 넘는 수업을 들었지만 나는 도무지 예법에 익숙해지지 못 했다. 사실 그리도 엄격히 예법을 어째서 지켜야 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그때만 해도 씁쓸한 차의 매력을 모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꾸준히 차도 수업에 나간 것은 차를 마시기 전에 내어주시는 화과자 때문이었다. 찹쌀과 밀가루, 설탕, 한천 등 재료로 달달한 소를 만들어 모양을 낸 화과자는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호사스러웠다. 선생님은 외국인 유학생인 우리를 위해 매번 유명한 과자집에서 과자를 사두시는 듯 했다. 토끼, 새, 과일 등 다양한 모양에 알록달록하게 색깔을 입혀놓은 과자는 음식이라기보다 예술에 가까웠다. 나무로 된 일본식 포크로 과자를 조금씩 떼어다가 입에 넣으면 세상 근심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지난 봄 찾은 경주에서 아주 오랜 만에 화과자를 만났다. 화과자를 파는 카페가 있다기에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가보았는데, 따뜻한 말차 대신 아메리카노에 화과자를 함께 먹는 곳이었다. 동글동글 귀여운 모양도 팥소의 달콤함도 즐거웠지만, 어쩐지 오랜 정좌 후에 저린 다리를 두드리며 먹었던 화과자와 차가 그리워졌다.
되돌아보면 내가 한 귀중한 경험 중 상당수는 그것이 귀한 줄 모를 때 찾아왔다. 30대가 된 지금의 나는 10여년 전 나보다 씁쓸한 차의 맛도, 어려운 예법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된 것 같은데. 언젠가 일본에 다시 가게 된다면 하야시 선생님이 만들어주신 진한 말차에 달콤한 화과자를 먹어 보고 싶다. 그때까지는 유튜브 속 화과자 영상을 주기적으로 찾아보는 수밖에 없겠지만.
※뉴스레터 끼니로그의 '내가 사랑한 한끼' 연재에 소개된 글입니다. 끼니로그를 구독하시면 매주 금요일 아침 식생활 소식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