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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squeen Sep 12. 2021

리멤버 9.11

강강약약




# 9. 11

        

2년 전, 가을.

미국 워싱턴 DC 출장을 갔을 때 뉴지엄(News+Museum)을 방문했습니다.


신문과 방송 등에 대해 다양한 전시를 하던 뉴지엄은 그해 연말, 재정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문을 닫았죠.

각 나라별 신문이 전시된 곳에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신문으로 조선일보가 보였고,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장벽 조각을 전시해놓은 곳과 9.11 테러를 기념한 전시관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2001년 9월 11일    


저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유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날따라 너무 짜장면이 먹고 싶어서

한국식당을 갔는데, 식당 TV에서 속보 자막이 나오더라고요. 잠시 후 뉴스에서 미국 뉴욕의 110층짜리 쌍둥이 빌딩이 공격을 고, 힘없이 무너져 내려앉는 장면을 보도했습니다. 주문했던 음식이 목에

넘어가지 않더라고요.


뉴지엄 9.11 기념관에서는 20년 전 그날, 미국에서 생중계되던 뉴스 특보 화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화면에는 방송 기자가 세계무역센터 빌딩을 배경으로 열심히 현장 상황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제 뒤에 있는 세계무역센터가  공격을 받아... 어떤 상황이고...”     


쌍둥이 건물 밖으로 간신히 빠져나온 시민들은 비명을 지르고, 나중엔 피를 흘리며 나오는 사람이 보이더니, 얼마 후 검은 연기가 더 짙어져 건물 째 무너져 내려앉는 과정에서 방송기자와 카메라 기자는 시민 인터뷰를 시도하며 움직이다가 화면에서 사라졌습니다. 현장에서 9.11 테러 상황을 중계하던 기자와 방송 스텝들은 그날 숨진 2천977명 중 한 사람으로 기록됐고, 중계 화면이 흔들리며 그 화면 속에서 기자가 사라지던 장면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9.11 기념관 앞에는 현장에서 발견된 기자들의 취재 수첩과 펜, 방송 장비 등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기자는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 사회에선 ‘기레기(기자+쓰레기)’로 취급받지만, 전 세계 어느 나라든 사건사고, 재난 재해 현장을 기록하고 전하는 사람이 기자입니다. 오지나 험지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서 현장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기자고, 전쟁터에서도 취재를 하고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기자입니다.     


2006년 9월 11일

 

저는 수습기자로 모 신문사에 합격해 첫 출근을 한 날입니다. 그해 7일 자 신문 1면에는 내 이름 석자가 적혀있었고, 11일엔 예쁜 정장을 곱게 차려입고 첫 출근을 했습니다. 그날은 정말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마냥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신문기자 5년, 방송기자 10년, 꼬박 15년을 ‘기자’라는 이름으로 살아오면서 참 행복했습니다. 기자는 취재원들이 ‘불가근불가원’의 존재로 생각하지만, 그래도 한번 마음을 터놓고 가까워지면 신뢰를 바탕으로 지면이나 방송에 내보내지 않는 깊이 있는 이야기들도 듣게 되고, 어떤 사안을 다양한 각도에서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눈이 생겨서 참 좋았습니다.      


기자라는 직업으로 15년 넘게 일하면서 그래도 내 직업이 감사하고, 이 일을 하는 게 행복하다 느끼는 건 참 복 받은 일이죠. 겉으로 보기엔 주목받는 직업일 수 있지만, 사실은 퇴근이 없고, 가족들의 희생이 많이 따르는 직업입니다.     




#체르노빌 취재


15년 동안 한 길을 걸어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취재 중 하나가 10년 전 체르노빌 원전 사고 현장을 취재했을 때입니다. 얼마 전 미국 HBO에서 만든 5편짜리 체르노빌이란 드라마를 봤는데, 정말 1986년 4월 26일, 사고 당시 그날을 생생하게 간접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원전 사고 당일 구소련은 진실을 숨기고 단순 화재라고 했기에, 사고 현장에 불을 끄러 갔던 소방관들은 모두 방사능에 피폭돼 숨졌습니다. 체르노빌 안으로 진입할 때 방문 허가증을 검사하는 초입에는 소방관들을 기념하는 동상이 있는데, 그 동상을 보고 너무나 가슴이 쓰라렸던 기억도 납니다.      


원전 사고 현장 인근에 구소련의 천재들만 모여 살았던 ‘프리퍄티’ 마을도, 과거 어떤 모습이었을까? 단순히 머리로만 생각했는데 ‘체르노빌’ 드라마를 보며 상당히 현실감 있게 재조명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프리퍄티 마을엔 넓은 광장이 있고, 호텔이 있고, 학교와 아파트, 극장 등 정말 그 안에선 모든 게 해결되는 완벽한 마을이었습니다. 취재 당시 방사능 측정기를 들고 학교 건물로 들어갔을 땐 칠판에 수업하던 내용이 그대로 쓰여있었고, 깨진 창문 틈 사이엔 커튼이 펄럭였으며, 책상 밑바닥엔 학생들 출석 기록부와 알림장, 일기가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학교 옆 유치원에선 인형들이 먼지에 뒤덮여 있었고, 아이들이 낮잠 자는 침대도 마치 병상처럼 다닥다닥 붙어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로 따지면 문화 예술 공연을 하는 극장엔 그 달 공연 예정자의 포스터가 붙어있고, 아파트에선 여권과 돈, 중요 소지품만 챙겨나간 사람들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원전 사고 며칠이 지나서야 마을을 떠났던 프리퍄티 사람들. 그들은 정부에서 마련해준 버스를 타고 도시를 빠져나갈 때까지만 해도 다시는 그곳에 돌아올 수 없으리란 것을 알지 못했겠죠.   

  

체르노빌 드라마 마지막 장면엔 원전 사고 현장을 집 밖으로 나와서 목격했던 프리퍄티 사람 중 생존자가 없다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방독면을 써도 모자란 상황에서 구소련 정부가 진실을 은폐한 결과, 수많은 인재들이 하늘의 별이 됐죠. 저는 체르노빌 취재를 떠올릴 때마다 소방관 분들과 프리퍄티 마을 주민들이 가장 가슴 아팠는데, HBO 드라마를 보면 광부들도 큰 희생을 치렀더라고요. 광부들은 몇 배의 임금을 주겠다는 말에 속아 아무런 안전장비 없이 원전 사고 현장 땅 속을 파고 또 파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시절, 구 소련에도 분명 기자는 있었겠지요.

최악의 인재가 발생한 체르노빌 원전 사고 발생 당시 기자들은 무슨 역할을 했을까요? 만약 방사능 이상 수치가 스웨덴에서 감지되지 않았더라면, 구소련은 얼마나 더 진실을 은폐했을까요?


10년 전, 체르노빌 취재 당시, 기자로서 현장에 가는 것은 의미가 있었지만 솔직히 두려운 마음이었습니다. 방사능에 피폭될 가능성? 나의 건강? 안전을 누구도 담보해줄 수 없기에 무섭기도 했습니다. 최 단시간 그곳에 머물며, 신속하게 취재를 하라고 하는데, 발걸음을 한 발짝 한 발짝 내딛기 전에 방사능 측정기로 피폭량을 측정하고, 이상 수치가 몇 백 배 오르면 다른 경로로 이동하고 했던 기억도 납니다.     





#강강약약


처음 기자가 됐을 때 저 스스로 다짐했던 게 있습니다.     


강강약약 : 강자 앞에 강하고 약자 앞에 약한 기자가 되자.     


15년이 흐른 지금, 그때 그 마음이 변치 않았는지 스스로 돌아봅니다.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더 기자라는 이름으로 일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봅니다.     

현장에서 멋있게 보도하는 기자, 중요 이벤트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기자,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기자의 모습 이면엔 때론 자신의 안전도, 생명도, 가족도 포기하고 취재 현장을 택해 그곳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기자들도 있습니다.      


저는 만 15년 동안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정부 부처를 취재할 땐 장관, 차관과 직접 대면해 질문을 하고, 법조를 출입할 땐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검찰총장을 만나 질문했습니다. 경찰청을 출입할 땐 경찰청장, 기업을 나갈 땐 그룹 대표에게 가감 없이 질문을 던졌지만, 취재원들의 기억 속에 나는 어떤 기자로 남아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건. 늘 내가 몸 담고 있는 언론사를 대표해 현장에 서있는 기자라는 것을 잊지 않았기에 당당하지만 거만하지 않게, 깍듯하지만 비굴하지 않게 질문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앞으로 남은 나의 기자 인생에 어떤 일과 어떤 만남이 펼쳐질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 사회를 흔들고 있는 이슈 속에서도 한때는 참 가까웠던 사람들이 이슈의 중심에 서있기에 저의 마음 또한 혼란스러운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누구를 만나든 처음 먹은 그 마음, 강강약약을 기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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