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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젹 May 08. 2024

Avril En France

날아내리다

2024년 4월 15일 

너의 출국 시간은 저녁 9시 즈음 이었다.  너는 옷만 대충 입고 씻지 않은 채 환전을 하러 동네 은행에 갔다. 네 지갑엔 네가 밟고 있는 땅에 따라 유용과 무용이 나뉠 두 종류의 돈이 들어있게 되었다. 잠깐 카페에 들러 에스프레소를 마시는데, 스멀스멀 설렘이 네 가슴팍으로 기어올라왔다. 아마도 대강 챙겨입고 나온 옷이 출국/Arriver(도착) 룩으로 괜찮아 기뻤던 것도 같다. 하루가 지나면 머나먼 땅에 발을 딛는다는 개념이 점차 사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서울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너는 맘을 잠깐 가라앉히려 한병철의 "서사의 위기"를 편다. 휘발되는 '스토리'가 아닌 너의 '서사'는 어디에 있을까 잠깐 고민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흔치 않은 선택들을 다소 해왔던 너에게 너의 서사는 언제나 변명조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머리를 한 번 흔들고 비오는 길을 따라 다시 집으로 간다. 


April 15th, 2024. 강원도 어딘가 위 3km 상공

너는 맥없이 짐을 싸고, 오래 떠나 있을 집을 정리하고, 보슬비를 맞으며 공항에 갔다. 네게 불쑥불쑥 설렘이 왔지만 너는 묘하게 차분했고, 맘에 들었던 터틀넥 니트와 트위드 자켓은 공항에서 입기에는 조금 두꺼웠다(너는 이때까지는 가져간 옷에 그렇게 감사하게 될 줄 몰랐다). 공항에는 떠나는 사람이 참 많았다. 너는 각 절차마다 뭔가 잘못되는 상상을 했다. 수하물로 부친 캐리어에 문제가 생긴다거나, 기내에 가져갈 가방이 너무 크다거나, 출국 날짜를 잘못 알고 있었다는 등의 걱정을 상상에 버무려 하는 동안 너는 비행기에 올라 있었다. 늘 걱정의 기발함은 현실을 따라잡을 수 없다. 13시간 30분을 가야 하는 비행기에는 영유아가 많았다. 가운데 그룹의 좌측 복도쪽에 앉은 너의 옆에는 약간 통실한 한국 남자가 위대한 개츠비를 틀고 곧장 잠에 들었고, 너는 좌석 앞 스크린 고장으로 승무원을 처음으로 호출한 승객이 되었다. 그 와중에 앞자리 일본 승객이 자리를 젖힐 때 위생 시트 같은 종이가 펄럭 넘어와 네 앞의 스크린 윗면을 가렸다. 너는 '그냥 스크린 쓰지 말까' 하다가 결국 복도쪽으로 살짝 나온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 말을 걸었고, 웃음과 함께 상황은 해결되었다. 


April 16th, 2024. 

너는 옅은 잠에서 깨어 난다. 네가 자기 전 틀었던 “플라워 킬링 문”으로 번역된 영화의 원제는 “Killers of the flower moon” 이었다. 뭔가 잘못된 번역 같았지만 아이들의 울음소리 덕에 뇌가 멍해진 너는 따져 보기를 포기한다. 한국어 자막이 안나와서 영자막으로 보고 있었던 너는 피로해서 (누굴 속여, 못알아들어서) 보다가 자버렸고, 제목의 번역을 따질 만한 이해도가 네게 없기도 했다. 아이들이 자주 보채며 울었고 넘실넘실 아이들을 달래는 그림자가 이따금씩 솟아올랐다. 다들 선잠을 잤는지 코를 고는 사람은 없었다. 

네가 가장 두려워 하는 것 중 하나가 갇히는 기분이다. 30개의 니코틴 껌을 챙기고, 읽을 거리와 쓸 거리를 챙겨도 결국은 어둠속에 잠겨 잊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네게 모든 것이 새로웠던 시절, 매 순간은 여행이었는데 30대의 너는 어떤 과정은 해내야할 일로 넘겨버린다. 그렇게 너의 시간이 점점 빠르게 굴러 내려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16. Huhtikuu. 2024

비행기는 전쟁을 우회하느라 13시간 30분을 날았다. 

경로사진. 출발할 때의 소리를 기록해 두었다.

파리로 가는 비행 한 번이 남은 상황이었고, 너는 잘 짜여진 메커니즘에 올라타고 붉은 눈으로 흡연구역을 찾아 헤맨다. 빠른 걸음으로 들어간 그 곳엔 새소리와 진한 살냄새, 푸른 담배연기가 가득하다. 


공항에는 네게 익숙한 언어가 울리지 않았다. 무국적의 건물 안에서 너는 처음으로 여행을 실감한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볼 것이 없었던 너는 에스프레소 한잔을 마시며 뇌를 깨운다. 공간이 달라져 아침이 되었기 때문이다. 


문득 네 머릿속에 문장화 되지 않는 한 구절이 떠오른다. 

"아주 먼 곳, 아주 오랜 시간"

너는 이 구절을 여러번 속으로 되뇌이며 파리행 비행기에 올라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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