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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젹 May 15. 2024

Avril En France

촉촉한 인사

16 Avril 2024

너는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 도착해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떠난다. 너의 감정은 인천에서 오는 길인가 싶을 정도로 색이 없었다. 문득 지하철 시트를 응시한다. 초록색에 빨강 도트 패턴이 예쁘다. 유튜브에 학습된 공포 때문에 너는 지하철에서 핸드폰을 꺼내지 않았다. '안전을 이렇게 신경 쓴 적이 언제였나' 가만히 생각하며 너의 관자놀이가 팽팽해짐을 느낀다. 

공항의 사인. "파리는 그대만을 기다렸어요"
환했던 파리의 첫인상

Auberkampf 역 앞은 맑았다. 에어비앤비 집주인은 Palmina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할머니였다. 이번 여행에서 너는 제대로 된 집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그 와중에 번역가인 Palmina 할미의 집 복도에는 책이 참 많아 보였고, 귀여운 고양이 두 마리가 있다니 고민할 여지가 없었다. 팔미는 네게 이곳저곳을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책에 관심을 보이자 작업실로 나를 안내하고는 예술 서적들을 신나게 보여주었다. "이 집은 네가 지내는 동안은 너의 집이야. 책도, 냉장고의 음식도 편하게 꺼내 쓰렴."이라고 물론 영어와 불어를 섞어 네게 말한 팔미는  너의 외할머니를 떠올리게 했다. 흰 털에 검정 반점이 있는 고양이인 삐야는 너를 보고 줄행랑을 쳤고, 회색 고양이인 츠키는 너의 다리에 볼을 비비며 환영해 주었다. 

삐야와 츠키
너의 방. Praktica 카메라, Ilford 필름

너는 여독에 그냥 누워있을까 하다가 지도를 보고 ‘공책을 사야지!’ 하고 길을 나선다. 가져온 드로잉용 공책이 있지만 왠지 조금 더 큰 공책을 사고 싶은 너였다. 창 밖 거리는 밝게 빛나며 너와의 첫인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귀여운 화방과 카페 테라스

그렇게 나선 거리는 옷가게, 작은 가게들로 힙과 촌스럼이 교차하는 희한한 모습이었다. 파리가 처음이 아닌 너에게 삼라만상이 다 신기한 설렘은 없었다. 다만 그 돌들이 반가웠다. La Palette du Faubourg라는 작은 화방에 들러 그 상점의 이름이 박힌 공책과 나무 없이 온통 흑연인 연필, 그 연필을 쉽게 깎을 연필깎이를 샀다. 그러다 비가 왔다. 너는 파리인간처럼 뾰로통한 표정으로 비를 맞고 걷고 싶었지만 비는 점점 굵어져 파리인간들도 뜀박질을 시작할 지경에 이르렀다. 비 피할 곳 없는 République 광장을 지나 아무 카페나 들어온 너는 테라스에서 그저 그런 빵과 감튀, 타르타르를 먹었다. 네 첫끼는 실패였다. 음식 맛은 물론이고 카페 바로 앞은 그림 공책을 펴기에도, 설렘과 함께 가져 나온 필름 카메라를 들기에도 애매한 뷰였다. 

덧. 프랑스 놈들이 “Madame”이라고 두 번이나 부름. 한 번은 주문받을 때, 한 번은 화장실 알려줄 때. 너는 그냥 '내가 예쁜가 보다' 하고 넘겼는데 "Mademoiselle(아가씨)"이 아닌 "Madame(부인? 아줌마?)" 이라는 사실에 분개했어야 했다. 


16:37 Canal Saint Martin

13 ºC. 구름 났다 해 났다 반복

관광객(중 인도 관광객 가족사진 찍어줌.) 개 산책하는 사람들. 영어를 쓰는 여성 2명과 검둥개, 누렁개는 다리를 건너 돌아감. 양편으로는 올리브색 다리. 한 마리의 비둘기가 털을 세우며 주변 비둘기를 쫓아냄. 오른쪽 다리에는 TU N’ES PAS SEUL(너는 혼자가 아니야)이라는 희망찬 글귀가 있음. 인도인 가족의 가장이 입은 흰 티에 SEPHO(RA로 추정)라는 단어가 적혀 있음. 앞으로 잎이 커질 나무들이 늘어져 있음. 물은 한 방향으로 흐르고, 가끔 바람이 긁고 지나감. 오늘만 해도 수차례 왔다 간 비로 보도의 돌들은 촉촉함. 쓰레기통에 달린 비닐은 글씨를 보니 원래 안쪽에 있었을 텐데, 밖으로 내던져져 있음. 인도인 가족 어머니가 자리를 떠나며 “BABAY, ENJOY YOUR… TRIP”이라고 해줌

*페렉의 "파리의 한 장소를 소진시키려는 시도"라는 책을 보고 이와 나름 유사하게 그 장소를 기록하려고 한 것으로 보임

생마르탱 운하 

네가 여행 중 쓴 글은 위의 내용까지다. 운하에 가기 전 너는 동네에 독립서점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고 두 곳 정도를 방문했다. 그중 한 곳에서 문득 너는 한국에서 가져간 조르주 페렉의 "파리의 한 장소를 소진시키려는 시도"라는 책의 원문을 사고 싶어 졌고, 점원의 도움을 받아 그 책을 산다. 이날 산 것들은 신기하게도 너의 여행 내내 크로스백에 담겨 있게 되었다. 운하에서 돌아온 너는 꽤 이른 시간에 잠이 들었던가, 저녁은 먹었던가, 사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En plus


네가 한국에서 가져간 시집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 파리에 사는 친구에게 선물하게 된 책이다. 비에 허탈해하고 있을 때 운 좋게 펼쳐진 시가 네 기분을 풀어줬다.    
"제목 없음 서점"
흑백 필름이 흐린 하늘에 적격이었다. 
생마르탱 운하는 이런 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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