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젹 May 23. 2024

Avril En France

글같이여행

17 Avril 2024


너는 간간히 들리는 차 소리에 7시에 잠에서 깼다. 팔미나 할미는 너에게 대로변이라 많이 시끄러울 수 있다고 경고했지만 파리의 취객들도 네 피로를 이기지 못했다. 너는 눈을 뜨고는 살며시 삐져나오는 미소를 나오게 둔다. 침대 속 네 시선 끝, 커튼과 창 너머엔 망사르 지붕, 자글자글한 부조가 있는 벽, 화분이 걸린 테라스가 누워 있었다. 너는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연다. 맞통풍(너는 제대로 된 환기를 위해서는 공기가 들어가는 곳, 나가는 곳이 모두 필요하다는 것을 건축학과에서 배웠다. 물론 다른 곳에서 배울 수도 있었을 테다.)을 위해 연 문 사이로는 고양이 츠키도 흘러들어온다. 창가의 1인 소파는 츠키의 모닝 루틴으로 이미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아침 빛
오래된 복도. 팔미나 할머니의 문학 컬렉션이 잔뜩 꽂혀있다. 까치집을 하고 소파를 뜯는 츠키


밝아버린 날을 위한 계획 따위는 없었던 네게 B의 연락이 왔다. B와 너는 한국을 배경으로 한 프랑스 영화에서 주연배우와 스탭으로 만났다. 이상한 2 국적(한국 프랑스 스탭들이 섞여 있었다.) 가족 같은 소탈한 분위기에서 스탭 배우 할 것 없이 모두들 친해졌고, 너는 B를 비롯한 프랑스에 있는 스탭들을 보러 가겠다는, 누가 봐도 빈 말로 넘길 약속을 지켜'버리'려는 마음에 다른 여행지는 고려하지도 않았다. B는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현지에서 배우활동과 모델활동을 하다 한국에 영화를 찍으러 왔었고, 지금은 마레에서 파리의 햇살과 조명을 받고 살고 있었다.  


너와 B가 만나기로 한 오전 11시까지는 아직 3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대충 옷을 걸치고 동네 빵집에 가서 바게뜨 하나를 샀다. 거리는 고요했다. 너는 일찍 길을 떠난 미국인 관광객 부부와 스쳐 지나간다. 그들의 여행이 일찍 시작되었다는 것이 너를 조급하게 만들지 않았다. 누군가에겐 당연하지만 너에게는 그것이 기분 좋은 사건이었다. 리뷰가 좋은 빵집에 도착했다. 젊은 점원은 환한 미소로 맞아 주었다. 사람들의 아침을 맞이하는 일에 걸맞은 웃음이었다. 최첨단 동전 계산 기계에 1유로 50센트를 넣으니 20센트가 굴러 나왔다. 구태의연한 현금계산은 기어이 이 나라엔 남아 포스와 연결된 동전기계를 만들어냈다. 어찌어찌 빵을 자르고 먹고 있을 때 고양이 삐야와 팔미나가 깼고, 맨 빵과 커피를 먹고 있는 네게 팔미는 살구 쨈, 버터, 생강 잼을 줬다. 프랑스인은 달게 하루를 시작하는구나 너는 생각하며 세상 맛있는 바게뜨를 먹는다.

빵을 사고 돌아오는 길 고요한 파리의 아침
달고 맛있어진 아침식사, 그걸 지켜보는 너


네가 우연히 B의 동네에 숙소를 잡은 덕에 만나기로 한 카페까지는 걸어서 갈 수 있었다. 너는 넉넉히 시간을 잡고 나와 동네를 걷다 Jardin de l'Hôtel Salé - Léonor Fini라는 작은 공원에 잠깐 앉는다. 남자 둘이 탁구를 치고 있고,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거나 뭔가를 끄적거리고 있다. 공원 안의 미끄럼틀에서 놀고 있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울린다. 쌀쌀한 오늘도 봄이라고 외치는 꽃들이 고개를 흔들고 있다. '너의 파리'에 한 장소가 더해졌다. 

Jardin de l'Hôtel Salé - Léonor Fini, Ilford Film
Jardin de l'Hôtel Salé - Léonor Fini, Ilford Film
Jardin de l'Hôtel Salé - Léonor Fini

동굴 같은 카페에 길쭉한 B가 커피를 주문하고 있었다. B는 이곳에서 더욱더 자연스러워 보였다. B와의 대화는 네게 아마도 여행 중 처음으로 '신나는' 경험이었던 것 같다. 너와 B는 삶에 대한 태도와 거기에 대응하는 ‘내적 투쟁’의 방식이 참 비슷했다. Café alongé(아메리카노. 양을 늘린 커피라는 뜻이란다.)와 café expresso(네가 한국에 돌아와서 안 사실, espresso를 불어로 이렇게 쓰기도 한다)가 놓여 있던 테이블에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라는 시집과 Jean Grenier의 “Les Iles(섬)” 이 올라왔다. 너는 공원에서 그 시집을 읽다 한국어 책을 구하기 힘들 B에게 선물하기로 결심했고, B는 프랑스 남부로 떠날 네게 본인이 남부 여행에서 읽었던 손때 묻은 책을 빌려주기로 맘먹었다. 그렇게 네 여행에는 그르니에가 동행하기 시작했다. 

B와 카페에서 나와서 비 오는 거리를 걸을 때쯤, 네가 B와 함께 일할 때 느꼈던 거리감은 사라졌고, 네 옆을 걷고 있었던 사람은 귀엽고 멋진 친구가 되어 있었다. 

책 교환식

이제 죠르쥬 페렉의 장소를 찾아갈 차례. 너는 길을 찾다 그냥 한 시간을 걸어 파리를 관통하기로 한다. 친구와의 만남에서 힘을 얻은 덕이었다. 비를 쏟은 구름은 금세 달려가고 하늘에는 푸른빛이 돌기 시작했다. 센강의 우안에서 좌안으로 가는 길, 너는 오랜만에 보주광장, 노트르담 성당의 뒤편, 일드프랑스 옆의 생-루이 섬을 지나 생 제르망에 접어든다. 마레지구에서 느끼지 못했던 관광도시로서의 파리가 너의 신경을 종종 긁긴 했지만, 그럼에도 이곳만의 풍경의 조각들은 너의 발을 가끔 멈추게 한다. 생-쉴피스 성당이 보이고 너는 가벼운 전율을 느낀다. 조르주 페렉이 글쓰기라는 행위로 소진시키려 했던 그 장소가 저 앞에 있다. 

Place des Vosges
Place des Vosges
길. 노트르담을 재건하는 장인들.
생쉴피스 성당이 보이기 시작했다.

Au café de la mairie. Place st. Sulpice

너는 곧장 페렉이 앉았던 카페에 앉았다. 아끼다 펼쳐 본 페렉의 책은 옮긴이의 말처럼, ‘기계적’이었다. 책에는 서사를 구성할 수 없는 사물과 사람, 사건의 조각들이 나열되어 있다. 50년 전부터 다니던 버스 노선, 그전부터 울리던 성당의 종소리, 어쩌면 책 속의 시제인 시월의 한기까지 너를 위해 '세팅'되어 있다는 착각까지 들 정도로 그 조각들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버스를 기다리고, 걷고, 한 손에는 쇼핑백, 가방, 아이, 개가 묶인 줄 등을 쥐고 있었다. 서로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인사를 건네고, 함께 무언가 이야기하며 지나가고, 희한하게 50년 전과 마찬가지로 일본인이 많았다. 너는 기억에 없었던 장소였음에도 변치 않아 반갑다는 독특한 감정을 느낀다. 책이 너를 이곳에 데려왔고, 글이 네 눈을 움직인다. 곧 이미지와 글은 한데 섞여 네 머릿속에 무겁게 자리 잡을 것이다. 너는 가끔 그곳의 버스 노선은 그대로인지, 카페의 이름이 바뀌진 않았을지, 여전히 일본인이 많을지 궁금해할 것이다. 그렇게 너는 지구 반대편의 한 장소를 아끼게 된다. 

여전히 남은 것들. Café de la Mairie, 버스 정류장.
조르주 페렉의 책 "파리의 한 장소를 소진시키려는 시도", 그리고 너의 시도.
Place St. Sulpice 생쉴피스 광장, 생쉴피스 성당

아쉬움과 후련함을 안고 너는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버스를 함께 기다리는 아주머니와 어색하지만 따뜻한 미소를 나눈 뒤 너는 주섬주섬 동전을 꺼내어 기사에게 주고 기사는 티켓 하나를 준다. 티켓을 어디에 찍을지 우왕좌왕하는 너를 보며 기사는 한심한 눈을 한다. 다음 승객이 버스가 오래 출발하지 않아서 본인이 탈 수 있었다는 식의 얘기를 하자 기사는 "늘 처음 타는 사람들이 있죠"라고 중얼거리고, 너는 차라리 불어를 못 알아들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한다.

버스 안에서

버스에서 내린 너는 마레지구를 조금 더 걷고, 온라인상에서 본 액세서리 가게의 유일한(!) 오프라인 샵을 발견하고, 동생과 엄마의 선물을 사고, 집으로 잠시 돌아왔다. 네가 번역가인 팔미나 할미에게 오늘 페렉의 책과 함께 한 여행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를 했을 때 팔미나 할미도 반짝거리며 본인의 책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너는 불문학을 좋아하지만 청강으로 들은 유일한 불문학과 수업인 "20세기 프랑스 소설" 수업은 팔미와의 심도 깊은 대화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녀는 너에게 거의 다그치듯이 마르게리뜨 뒤라스를 꼭 읽어보라고 권했으며, 그녀가 실수로 한 권 더 산 조르주 페렉의 책을 선물해 줬다. 열정을 가지고 아직까지 이-불 번역가(이탈리아어-불어. 팔미는 시칠리아 출신이다.)로 활동하고 있는 그녀가 네 눈에 참 멋져 보였고, 프랑스 소설을 좋아하는 네 스스로를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더 좋아하게 되었다. 

팔미가 빌려준 책, 팔미가 준 책

제대로 된 점심을 먹지 않았던 너는 늦은 저녁 숙소 옆 레바논 음식점에 가서 지나치게 맛있는 양배추 구이를 먹었다. 단골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네 옆 자리에 앉아 점원들과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식사를 했다. 2-30대의 직원들은 돌아가며 지나갈 때마다 그에게 말을 걸며, 외롭지만 유쾌한 노인을 살뜰히도 챙겼다. 네게 파리가 도시에서 동네로 보이게 된 순간이었다. 밤, République 광장까지 걷기로 한다. 공원이 이어져 있었지만 마리화나 냄새와 힙합 음악 소리에 겁이 난 너는 공원 담벼락 밖으로 난 길을 따라 걷는다.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한다. 밤공기는 차고, 도시는 고요했다. 


레바논식 양배추 구이, 밤 산책
밤의 빛, Ilford Film
Ilford Film
Ilford Film

파리에서의 첫 이틀 동안 너는 자신도 모르게 이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갖췄다. 함께 떠날 글. 생쉴피스 광장에서 너는 글과 함께 하는 여행이 얼마나 즐거운지 깨달았고, 친구에게 받은 글은 이어진 여행 동안 네게 생각지도 못한 자유로움을 선사했다. 글 같은 여행, 글과 같이하는 여행의 첫 장이 넘어가고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Avril En France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