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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젹 Jun 03. 2024

Avril En France

둘혹은하나

18 Avril 2024


H는 파리에서 유학을 하고 있는 친구이다. 같은 대학 출신이지만 네가 졸업한 후 알게 된 H와는 상수동 어느 술집에서 처음 만났고, 그는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너에게 밤의 북적임을 종종 겪게 해 주었더랬다. 네가 Opéra 역을 나와 처음 마주한 것은 깃발을 든 가이드들과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이었다. 난민을 위한 서명을 받는 사람이 네게 다가왔다. 한국에서 서명만을 원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을 기억하는 너였지만 여기는 뭔가 다를까 싶어 너는 서명을 해줬다. 역시나 그 사람은 후원금을 요청했고, 네가 친절히 거절하는 사이 H가 왔다. 좁은 보도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걸으면서도 둘은 둘의 시차를 좁히려 말을 이어갔다. 대화를 하는 너는 조금 더 그 거리에 속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15일간의 여행 중 그 땅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너의 여행은 어땠을까. 너는 아마 조금 더 빨리 지쳤을 것이다. 카페 겸 공유사무실 겸 식당에서 양고기를 먹고 너는 본격적으로 너의 여행에 H를 초대한다. 

Passage Choiseul. H가 계속 파사쥬 '최슬'로 읽는 바람에 너의 몰입이 깨졌다.

너의 여행이 시작되기 전, 먼 길을 떠나는 너의 친구에게 오래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 도착했다.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그것인데, 너는 학창 시절 건축도서관에서 처음 그 책을 읽은 이후 그 책이 늘 갖고 싶었다. 그중 전쟁으로 망가지고 붕괴된 유럽의 아케이드들(갤러리, 혹은 프랑스에서는 파사쥬라고도 부르는)을 다룬 부분이 네 머릿속에 남았고, 페이지를 넘겨보던 중 발견한 "파사쥬 슈아죌 Passage Choiseul"이라는 곳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너의 여행 계획에 몇 안 되는 '꼭'이 하나 생겼다. H는 기꺼이 너와 동행해 주었고, 둘이 마주한 파사쥬는 생기가 돌았다. 19세기에는 각국의 '만물'이 모였을 그곳에는 식당들과 카페들이 꽤 많이 들어섰고, 너는 남아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들을 렌즈에 담았다. 너는 몇 안 남은 골동품 가게에서 미술감독님 선물을 오래 고민해 샀다. 숱한 소품과 숱한 고급진 것들을 봤을 어른의 선물로 네가 고른 것은 20세기 초반 물건으로 보이는 자개 장식의 망원경이었다. 


Praktica ltl에 Cinestill 400D 넣어 촬영.

파사쥬를 구경한 후 너희는 근처의 작은 공원에 도착했다. 사람들은 잔디에 앉아 점심 이후의 여유를 누리고 있었고, 나뭇가지를 든 소년과 소녀가 분수 주위를 분주히 누리고 있었다. 너는 흐렸던 여행 초반부를 지내고 드디어 난 햇살에 난생처음 산 선글라스를 꼈다. 너는 눈의 촉감은 편해지고 시각은 불편해지는 것을 느낀다. 색을 있는 그대로 보고 싶어 하는 네게 선글라스는 한동안 무용의 물건이었지만 너도 나이를 먹으면서 눈부시게 아린 감정이 단순한 아픔으로 치환되는 과정 중에 있었다. 

H가 노트북으로 회의를 하러 어딘가에 가서 앉아야 했고, 너는 기꺼이 그가 마련한 정적인 시간에 동참하기로 한다. 다시 찾은 파사쥬 슈아죌의 카페 2층에서 너는 한동안 밖을 바라봤다. 3m 정도 올라갔을 뿐인데 네가 본 파사쥬의 매력은 또 달랐다. 천장을 덮은 유리와 구조물들, 1층과 2층 사이에 붙은 전등들이 네 눈에 더 잘 들어왔고, 너는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고 여유롭게 그곳의 구조와 장식을 관찰할 수 있었다. H의 회의가 늦어졌던 덕에 너는 그림도 그리고 잠깐 나가 파사쥬 슈아죌 끝에 있는 오래된 그림들, 책들도 구경할 수 있었다. 혼자 여행한 지 얼마 안 된 너였지만 누군가에 의해서 결정되는 시간과 공간을 꽤나 반갑게 느꼈던 것 같다. 

Praktica ltl에 Cinestill 400D 넣어 촬영.
H와 함께, 또 따로 걸었던 그날의 풍경들.

언제 만날 지 모르는 너와 H는 정처 없이 걸었다. 각자의 공간과 시간은 떨어져 있었지만 사랑과 일, 사람에 대한 고민은 꽤나 비슷했다. 대화가 많고, 너의 생각의 여유는 없었지만 그래도 파리는 그곳에 있었고, 종종 멈춘 너는 잠깐씩 파리가 주는 시각적 자극에 너를 맡기곤 했다. 숙소로 잠시 들어온 너를 맞은 것은 팔미나 할미와 그녀의 여동생 Laura였다. 너는 시칠리아 할매 둘과 신나게 이야기를 했다. 놀랍게도 고(故) 이선균 배우에 대한 뉴스가 프랑스까지 이어졌고, 팔미나 할미의 동생은 거의 한 달간 그 소식에 우울해했다고 한다. 예술과 마찬가지로 폭력도 멀리까지 힘을 잃지 않고 마음을 울린다. 

힙했던 루프탑
아무도 오지 않았던 너의 자리

@Bar le perchoir

너는 일몰이 잘 보일 시간에 맞춰 루프탑에 갔다. 비둘기 소리와 쥐로 추정되는 찍찍거리는 소리가 음악에 섞여 있었다. 너는 눈으로 소리를 따라가 봤고, 소리는 앉아있는 박스형 나무 벤치 아래에서 나고 있었다. 숙소에서 Palmina와 Laura 자매는 네게 일몰 스팟으로 몽마르트를 추천했지만, 이번에는 ‘내 파리’를 만들고 싶었던 너는 11구의 루프탑으로 왔다. 사람이 벌써 많긴 했어도, 너를 위한 완벽한 장소는 있었다. 


밤이 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Praktica ltl에 Cinestill 400D 넣어 촬영.


도기로 된 수많은 연통들, 멀리 사크레쾨르. 완벽한 Paysage Parisienne. 어린왕자는 의자만 옮기면 일몰을 볼 수 있지만, 지구인에게는 약간의 센스, 용기, 감이 필요하다. ‘죽어도 좋아’는 아니지만 뭉클한 풍경이라 생각한다. 그래, 이러려고 너는 왔다. 너는 문득 밤은 또 어떻게 열릴까 기대하게 된다. 

사크레쾨르와 라데팡스가 보이는 일몰. Iphone 15 pro.

이 날의 너는 글을 많이 남기지 않았다. 누군가와 함께일 때의 너는 그 사람에게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 있어도 너의 주의와 생각을 많이 할애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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