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좋은날_2
19, Avril, 2024
달리는 94번 버스 안, 창 밖을 보며 앉아있던 너는 지도에서 Place de L’Europe , 즉 무려 유럽 광장을 발견했다. 날이 너무 흐려 실망하던 참이었고, 약속 시간인 7시 반까지 계획이 없던 너는 흐린 날과 철도 위를 지나가는 광장의 분위기를 상상해 보고 문득 힘이 생긴다. 내릴 타이밍을 놓친 너는 버스 바퀴자국을 따라 철길 옆을 걷는다. 산업화가 남긴 거대한 흉터처럼 생라자르역에서 뻗어 나온 철도는 지하 2층 정도의 깊이로 거대한 운하를 이루고 있었다. 문명의 절벽 위에 아빠뜨망들이 중정을 내보이며 서있었고, 도대체 어떻게 그린건지 모를 그래피티들이 건물의 피부를 꾸며놨다.
걸으며 철로를 바라보던 네 눈에 철로를 관리하는 어떤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람은 너와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며 너와 보조를 맞춰줬다.
유럽 광장은 네 예상과는 조금 달랐지만 진짜는 그 바깥쪽에 있었다. 철로에 드라마틱하게 떨어져 있는 빨간 천, 녹색 애자, 녹슨 구조물들은 너와 너의 카메라 렌즈를 철조망에 바짝 붙게 했다. 누군가가 떨어뜨려 놓은 어떤 하루의 조각이 너에게는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안도를 줬고, 아마도 언젠가 기억에 남을만한 그림을 만들어주었다.
왔던 길을 가기 싫어서 '로마거리' 쪽을 걷던 네가 본 것들. 네온이 참 예뻤던 카페, 악기사 거리. 네가 좋아하는 뮤지션인 강이채 언니가(남성인 너는 네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언니라고 부르는 버릇이 있다.) 미국에서 만난 프랑스 할아버지(그녀의 바이올린)가 이런 곳에서 태어났거나, 적어도 한 번쯤 치료는 받지 않았을까 상상하게 됨.
너는 이번 여행에서 특화거리라 불릴만한 거리들을 몇 차례 마주쳤다. 숙소 옆의 중고 카메라 거리가 그랬고, 생제르망의 일본만화거리가 그랬고, 이번에 마주친 악기사 거리까지. 공공에서 만든 대단한 입간판 없이 가게와 가게가 이루는 거리의 분위기가 은근했어서 너는 그곳들이 맘에 들었다. 한국의 특화거리들은 소리를 지르는 느낌이랄까. 어떤 일이 생겨서, (젠트리피케이션이든 천재지변이든) 가게들이 밀려나도 이 도시에서는 다른 동네에 다시 스며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너였다.
너는 어느 자매가 하는 카페샵에 들어가 테라스에서 길고도 고됐던 반나절을 기록한다. 담요를 뚫는 한기가 너를 덮치고, 내부로 피신한 너는 가지 않는 시간을 신기해하며 그날의 최악이자 최고의 선택을 하게 된다.
덧.
하루가 세 개의 글로 토막이 날 예정이다. 이 날은 분열적이었고 풍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