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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젹 Oct 16. 2023

그러려니

바쁘다. 이별은 했다. 

처음으로 단독으로 오픈세트(일반 세트장이 아니라 실제 공간에 목공, 칠 등의 세트 작업을 하는 장소) 감리를 했다. 처음에는 약간 일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몰랐지만, 그래도 금새 적응했다. 직업적성검사 같은 걸 하면, '자율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결과를 받곤 하는데 오늘이 그 자율성의 끝이었다. 디자인을 했고, 과정을 팔로우를 했지만 내게 실무권한과 책임이 주어진다는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지만 일 찾아서 하는 재미를 혼자 잔뜩 느꼈다. 오늘 같은 날 내가 일하는 모습을 누군가 지켜봤다면 '잘한다' 생각했을텐데, 난 누가 있을 때 항상 뚝딱거리니까 전제가 잘못된 상상이다. 세트팀이 떠나고 근처 카페에서 오늘 작업 내용을 정리하기도 하고 작화팀 일정도 조율하고, 혼자 열일을 마친 게 일곱시 반쯤이었다. 운전을 해서 잠깐 아트디렉터님께 무전기를 전해드리고 (트렁크에 그게 있을 줄이야) 집으로 돌아오니 9시 반. 


보람찬 하루 끝 엄청난 공허가 밀려왔다. 


딱 2주 전에 이별을 했다. 첫 주는 기분이 좋지 않았고, 둘째 주는 몸이 아팠다. 감기에 이어 장염에 걸려 이틀을 금식하고 하루는 죽을 먹었다. 그 중 하루는 쉬었고 이틀은 일했다. 오늘 장염이 얼추 나은 것 같았다. 밥을 먹었는데 배가 많이 아프지 않았고, 몸도 가벼웠다. 뇌는 장에서 신경을 끄고 다시 감정에 집중해버리고 말았다. 


각종 스트리밍 앱을 켜보고 이것저것 보다가 지금의 나는 이런 것들로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잠옷 위에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와 걸었다. 결국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얘기를 나눴다. 20대에 함께 산 4년이 지난 후 대체할 수 없는 좋은 친구가 되어주는 존재. 이런저런 넋두리를 했다. 요약하면 이렇다. 1. 헤테로 남성이지만 수다와 소소한 감정 나눔을 좋아하는 나의 친한 남자 친구들은 정작 다 무뚝뚝하다. 2. 여자사람친구와 잘 맞아 꽤 많은 여사친들이 있지만 30대가 된 그들은 일/연인/가정 때문에 연락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3. 나는 애인과 헤어졌다. 1+2+3=MEMYSELFANDIALLALONE. 이 등식의 오류는 내 결점이 고려되지 않았다는 것임을 알고 있다. 야근을 꽤나 많이 하고, 주말주중 없이 일하는 시기가 개월 단위로 생기고, 수도권 밖에서도 자주 일한다. 이런 친구는 만나기 어렵다. 자주 못 만나는 친구는 소중하지만 멀다. 논리적인 친구가 이 문제를 풀어준다면 참 좋겠지만 이런 문제를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은 왠지 말을 못됐게 할 것 같다. 


동생과 전화를 끊고, 동생과의 대화에서 한켠에 계속 멤돌았던 노래를 듣는다. 선우정아의 <그러려니>. "만나는 사람은 줄어들고, 그리운 사람은 늘어간다. 끊어진 연애 미련은 없더라도, 그리운 마음은 막지 못해"로 시작되는 노래다. 이 가사에 공감하기 시작한지 꽤 오래 됐는데, 꽤 오랫동안 만나는 사람은 줄어들었고, 그리운 사람은 늘어갔다. 사실 이 글을 시작할 때에는, 그 곡 다음에 랜덤재생으로 나왔던 Bill Evans의 <My Funny Valentine>이 처음 들어보는 것 같은데 너무 좋았고 그래서 음악이 내 친구였구나 하는 울컥한 마음이었는데, 그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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