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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젹 May 08. 2024

Avril En France

떠나버리다

Prologue


기록해 두고 싶은 대화가 있다. 기록해 두고 싶은 하루가 있다. 기록해 '내고' 싶은 여행을 하고 왔다.

너는(여행기에서 2인칭을 써보려 한다. 쓰는 내가 좀 헷갈리겠지만 그때의 나를 친밀한 타자로 돌아보는 느낌이라 왠지 이 여행과 어울릴 것 같다.) 7월 말부터 3월 말까지, 8개월 간 모 작품의 미술팀에서 일을 했다. 처음으로 참여하게 된 장기 프로젝트이자, 해왔던 모든 작품들보다 컸다. 보람과 배움이 매우 많았지만 이와 별개로 너는 때로 지쳤고 작품이 끝나갈수록 보상받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그 시절 너의 일기들


8/17

“너 지치지 않겠어?”라는 말을 들을 때 지친다. 

쉼이 확실치 않은 날이 이미 다가왔음을 느끼고, 살짝 지쳤나 보다. 과감하게 내 식대로 생각할 수 있을 때를 잘 이용해 보자. 잘하고 있다. 


1/13

“내가 예민한 건지 모르겠지만”으로 시작하는 생각이 많이 찾아온 오늘, 나는 예민했다. 모든 자극이 너무 시끄러운 하루. 부정적인 사람의 영향일지도.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을 매끄럽게 했다. 그것으로 내 하루는 보람차지 않다. 


2월 13일

간밤에 비행기표를 샀다. 



1월 13일과 2월 13일 사이 언젠가, 너는 해외여행을 떠난 지 몇 년이 되었는지 속으로 세어 보았다. 2018년 건축과 졸업전시 전인 2월, 친구들과 도쿄를 다녀온 게 마지막이었으니, 6년이 지났다는 걸 깨닫고 너는 꽤나 놀랐다. 그 6년은 네가 건축설계사무소를 거쳐 영화/드라마 미술팀에서 일하기까지, 게을렀을지언정 편하지는 않았던 세월을 보내고, 지구가 역병에 물들어 공항들과 항구들이 문을 닫아 거는 모습을 지켜보던 시간이었다. 많은 월급은 아니었지만 돈 쓸 시간이 없어 이미 돈이 조금 모여 있었고, 3월 말까지 일을 한 후에는 어딘가로 떠날 만한 돈이 모일 것도 같았다. 너는 생각한다. 


'이왕 가는 거 조금 멀리 가볼까?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출발할 것 같아서 너무 힘든 곳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지도도 펼쳐보고 에어비앤비 앱도 보던 너는 프랑스 남부 액상프로방스의 한 숙소를  본다. 2층의 테라스에서 찍은 사진 속 근경은 작은 수영장과 정원이고 원경은 큰 평지를 품은 머나먼 높은 산이다. 너는 고등학생 시절 미술에 처음 관심을 가졌을 때 알게 된 폴 세잔과 그의 "생트 빅투아르산 연작"을 기억해 낸다. 세잔이 치열하게 연구했던, 세잔에게 그렇게 다양한 색과 모양을 내어준 그 산이 액상프로방스에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몸으로 느껴지는 설렘이 네게 찾아왔다. 


프랑스 남부인 마르세유나 니스로 가는 비행기표는 꽤 비쌌다. 너는 파리로 가는 비행기를 예약했다. 파리에는 네가 만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으니 겸사겸사 좋은 계획이 될 것도 같았다. 작품이 끝나기 전 틈틈이 여행의 빈 곳들이 채워졌다. 잘 곳들과 탈 기차들이 정해졌다. 만날 사람들도 떠올랐다. 너는 때때로 설렜고, 그보다 자주 두려워했다. 너의 유튜브는 유럽의 소매치기 영상들과 짐을 도둑맞은 사람들의 눈물로 잔뜩 찼다. '잘 설렜으니 그냥 가지 말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들도 했던, 한껏 지친 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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