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좋은 추억만으로도 살 만한지 모른다
책상 앞에 앉아 차를 마시며 서류를 뒤적이다가 나도 모르게 손길이 멈췄다. 인터넷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신경이 쏠린다. 랜덤으로 실행시킨 플레이 리스트 곡들 중 하나였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음악인데 뭐였더라?'
어렴풋이 알 것만 같은 곡의 제목을 떠올리려고 귀를 기울인다. 이내 수년 전 과거의 기억들이 소환된다.
이제는 생김새도 잘 기억나지 않는 옛 연인이 즐겨 듣던, 아니, 정확히는 나에게 자주 들려주었던 영화 OST 였다. 마음에 드는 영화를 수 십 번씩 다시 보고, 그 영화의 OST까지 섭렵했던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곡이라면 귀에 인이 박이도록 내게 들려주고는 했다.
함께할 때마다 배경음악처럼 늘 틀어 놓았던 음악이 지겨워질 만도 했건만 싫지 않았다. 결국엔 나도 좋아하게 됐다.
오랜만에 들려온 음악 하나가 기억 어딘가 묻혀 있던 과거 시간 속, 그때 그 순간의 나를 되살려냈다. 어느새 나는 그가 틀어 놓은 음악을 백색 소음 삼아 노트북을 두드리며 과제를 하는 대학생의 모습으로 책상 앞에 앉아 있다. 한참 집중하다 문득 뒤편에 앉아 있는 그의 인기척을 느끼고 뒤돌아 본다. 눈이 마주쳤고, 이내 수줍어진 얼굴을 돌려 다시 모니터를 응시한다. 그리고는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었던 것 같다.
그때의 설렘이 깨어나 노트북에서 들려오는 음악의 선율을 타고 마음을 간지럽힌다. 과거의 기억들은 간혹 실제보다 미화되기도 한다지만 몇몇 기억은 찰나를 박제하는 사진처럼 뇌리에 또렷이 박혀 미화시킬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내 기억 속 그날은 햇살이 잔뜩 내리쬐는 창문을 마주한 테이블 위로 하얀 시폰 커튼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 방안에 머물렀고, 살짝 열어둔 창문 사이로 바깥바람이 드나들며 간간히 땀을 식혀주던 어느 여름날 오후였다. 같은 공간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행복을 다 가진 것처럼 즐거워했던 이십 대의 그와 나는 소소한 일상에 설렜고, 더 많은 시간 동안 서로의 일상이 되길 바랐었다.
지금은 희미하게, 아주 가끔씩, 파편처럼 떠오르는 그때가 그립다. 옛 연인을 다시 만나고 싶어서라기 보다는, 그의 곁에서 한껏 행복에 겨워 순수한 사랑을 했던 그때의 내가 그리워서다. 음악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애틋하고 설렜던 그 시절의 내 마음이 그리워져서다.
사람은 추억만으로도 살 만하단다.
드라마 <연애시대> 에서 여자 주인공의 친구가 이런 말을 했었다. 드라마가 방영되었던 당시, 이십 대였던 내게 크게 와닿지 않던 대사를 십 수년이 지나 지금은 이해하게 됐다.
아련해진 옛사랑의 기억에 지금 내 책상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달리 보인다. 과거를 추억하며 다시 설레고, 풋내 나는 순수한 감정이 살아나고, 잠시나마 다시 수줍어지기도 한다. 기분 좋은 시간여행을 다녀온 듯 하다.
미래의 어느 날, 혹여 지금 이 순간을 추억하게 된다면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며 노트북을 두들기던 햇살 좋은 오늘 오후의 기억이 되살아나겠지. 따뜻한 찻잔의 온기, 은은한 향기와 더불어 나지막이 흘러나오는 영화 OST에 문득 귀를 기울이다 과거를 회상하는 내가 떠오를 테고, 과거의 과거에서부터 비롯된 애틋하고 따뜻한 감정들이 되살아나 미래의 나에게 좋은 에너지로 전달될 것이다.
잊히지 않는 좋은 기억은, 그리하여 추억하는 것만으로도 살 만하게 하는가 보다. 미래의 과거가 아름답고 따뜻하게 채워져야만 하는 이유, 오늘의 내가 행복해야만 하는 이유를 이렇게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