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01
우리는 새해 카운트 다운을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카운트 다운은 못했다. 저녁 7시 30분부터 오전 12시까지 무슨 얘기들이 오고 갔는지 조차 기억이 희미할 정도로 정신산만 하게 지나간 거 같다. 못 나눴던 얘기도 나누고 사소한 거에 배꼽 잡고 웃으며 노래에 맞춰 리듬을 타면서 야식을 만들기 바빴다. 카운트 다운을 벼르고 있었는데 밖에서 울려 퍼지는 폭죽 소리 덕분에 새해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밖으로 뛰쳐나가서 폭죽을 잠시 감상하고 서로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을 주고받으며 남자친구와 12시 01분에 첫 셀카를 남겼다. 이렇게 내 새해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게 시작되었다.
새벽에 귀가한 후 몇 시간 뒤에 나는 또 남자친구와 새해 데이트를 앞두고 있었다. 의도치 않게 새해를 Kew Gardens 식물원에서 맞게 되었다. 이 크고 넓은 공원 안에는 영국에서 보기 드문 열대 식물들도 많이 볼 수 있고 꽃들과 나무들로 꾸며져 있다. 이 아름다운 식물원이 12월 한정된 기간 동안 크리스마스 조명으로 장식되어 있고 이른바 Christmas at Kew라고 불린다.
오후 5시 30분. 큐가든 지하철 역에 도착했다. 남자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 자기 곧 내린다는 짧은 통화 내용이었다. 우리는 반대방향 지하철을 타고 정확히 10초 차이로 큐가든에 도착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봤는데도 반가운 얼굴이었다. 우리는 역 근처에 열린 유일한 레스토랑 Pizza Express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오후 7시에 큐가든으로 향했다.
큐가든 정문에는 줄 서서 입장을 기다리는 가족들이 많았다. 티켓을 보여주고 수월하게 입장을 했다. 공원을 살펴보기 이전에 우리의 시선을 빼앗은 건 다름 아닌 음식 가판대들이었다. 우리는 자연스레 와플 상점대 앞에 줄을 섰다. 누텔라가 듬뿍 올라간 따뜻한 와플은 너무 달콤했다. 남자친구와 나는 서로 바라보며 기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하나씩 사이좋게 나눠먹고 우리는 뱅쇼를 마시면서 큐가든을 본격적으로 구경하기 시작했다. 오른쪽 손에는 뱅쇼를, 왼쪽 손에는 남자친구 손을 잡았다. 행복했다. 내가 걷는 이 길은 예쁜 조명들로 꾸며져 있었고 크리스마스 노래가 큐가든에 널리 퍼졌다. 행복했다는 말이 겸손하게 느껴질 정도로 감정이 벅차올랐다. 너무 추워서 손을 호주머니 밖으로 꺼내고 싶지 않았지만 이 찰나들을 눈으로만 담기에는 아쉬웠던 마음이 큰 나머지 나는 아이폰을 3분 간격으로 만지작했던 거 같다.
Christmas at Kew 관람 코스는 약 2km 코스로 75분이 소요된다. 오후 5시부터 10시까지 오픈돼 있으며 7시 40분까지 입장 가능하다. 공원을 도는 내내 멋진 조명 설치들로 감탄이 끊이지 않았다. 지루할 틈 없이 순식간에 두 시간이 지나간 거 같다. 큐가든 산책 코스 내 곳곳에 음식 가판대들이 있어서 따뜻한 뱅쇼와 달콤한 추로스 등의 간식들을 사 먹을 수 있다.
우리는 한참을 걷다가 몸을 녹이려 실내로 들어가 따뜻한 디 카페인 차를 주문했다. 서로 한동안 말없이 지그시 쳐다보았다. 따뜻한 온기가 우리를 맴돌았고 어느새 우리들의 얼어붙은 몸은 녹아내렸다.
새해부터 사랑하는 사람과 의미 있는 시간을 평온하게 보내는 게 평범한 거 같으면서도 결코 당연한 게 아니기 때문에 이런 시간들을 허락해 주신 것에 감사했다. 우리는 이렇게 내년 새해도 큐가든에서 보내자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