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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병찬 Oct 26. 2020

서은국, "행복의 기원"

행복해지려고 노력하지 말자

문득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이런 불행의 감정은 대부분 작은 물결처럼 찾아왔다 금새 사라지지만, 가끔씩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와 사람을 압도할 때도 있다. 몇 년간의 수험생활 끝에 운좋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에 다니던 시절 이런 불행의 파도가 찾아왔다.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오랜 시간 꿈꾸던 곳에 이제 겨우 도착했는데 감사하지는 못할 망정 불행하다고 느끼다니. 특히 고시촌에 남아있는 동료들을 생각한다면 불행하다고 느끼는 건 일종의 정신적 사치였다. 


불행하다는 감정을 극복해보려고 행복에 대한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지금은 제목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 책들이 들려주는 조언은 대개 비슷했다.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해라. 행복은 너의 마음 속에 있다. 작은 일에 감사해라. 잠들기 전에 오늘 하루 가장 행복했던 일 3가지를 적어보라. 책에서 시키는대로 해봤지만 며칠만 지나면 마음이 예전의 상태로 돌아왔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불행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 하는 건 전문가의 조언을 성실히 따르지 않은 나의 노력 부족 때문일 거라고 자책하며 힘든 시기를 버텼다.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뒤에도 몇 년에 한번씩 불행의 파도가 밀려왔고, 그럴 때마다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았다. 그러다가 몇 년전 서은국 교수님이 쓰신 "행복의 기원"이라는 책을 우연히 알게 됐다. 책에서는 행복에 대한 여러가지 내용을 소개하고 있지만 그 중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행복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바로 '유전'이며, 유전이라는 요인 하나가 행복을 결정하는 31개의 요소 중 거의 50%를 차지한다는 사실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특정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50점을 넘길 수 없다는 뜻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지만, 유전이 행복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은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마치 다이어트에 계속 실패하고 있을 때 누군가 다가와 "네가 살이 찌는 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저 살이 잘 빠지지 않는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을 뿐이란다."라고 얘기해주는 기분이었다. 행복의 상당 부분이 나의 노력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 순간 스스로에 대한 비난을 멈출 수 있었다.


이 책은 종래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이 아니라, 수많은 실험을 통해 과학적으로 증명된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 행복을 기술하고 있다. 책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행복이라는 목적을 위해 산다고 얘기하지만, 인간은 행복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생존과 번식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산다. 그렇기 때문에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행동을 하면 쾌락(행복)을 느끼는 유전자가 우리 안에 자리잡게 됐다. 우리가 열량이 높은 기름진 음식을 먹거나,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거나, 다른 사람들과 좋은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거나, 짝짓기를 할 때 행복(쾌락)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그때문이다. 따라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쾌락을 주는 경험들을 최대한 자주 하는 수밖에 없다.


저자의 이와 같은 주장은 매우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인간은 결국 동물일 뿐이며, 동물이 행복을 느끼는 방식과 인간이 행복을 느끼는 방식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행복에 대한 과학적 연구의 결론이라면 그것이 유쾌한지 여부를 불문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게 아닐까. 


그래도 다행인 건 이 책에서 알려주는 몇가지 검증된 사실 덕분에 우리는 보다 행복해질 수 있는 몇가지 규칙들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첫째, 일정 수준을 넘어서는 물질적 풍요는 행복을 증대하지 못한다. 둘째, 집단주의적 경향이 강한 집단에서는 개인의 행복감이 줄어든다. 셋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에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공고한 인간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런 몇가지 결론을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이걸 실천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일 것이다. 규칙적인 식사와 운동, 금연과 금주가 몸을 건강하게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이걸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다만 행복이라는 시스템의 작동 원리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설사 그걸 실천하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터무니 없는 행복론에 빠져 시간을 허비하게 되는 일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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