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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병찬 Jun 19. 2024

박민규,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진짜 야구를, 진짜 인생을 복원하기 위한 두 남자의 이야기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처음 접한 건 아주 오래전 일이다. 사법시험에 떨어져 방황하던 시절이었다. 힘들게 준비했던 시험에 떨어지자 많은 사람들이 위로의 말을 건냈다. 괜찮다, 다시 하면 된다, 원래 어려운 시험 아니냐 등. 하지만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가식적으로 건네는 말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나를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들, 심지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위로도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 자존심에 생긴 깊은 상처는 아물 줄 몰랐고, 세상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으로 온 몸이 불타올랐다.


시험에 떨어진 후에도 마음에 상처를 남기는 일은 끝없이 이어졌다. 예비군 훈련에 갔다가 직업란에 "무직"이라고 적을 때에도, 형이 보내준 용돈으로 아버지 회갑 선물을 살 때에도, 아물어가던 상처가 다시 벌어졌다. 당시의 나에게는 학교도, 회사도 없었다. 나는 가족을 제외하고는 단 한번도 소속감이라는 걸 느껴본 적이 없었고, 소속이라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아니었지만,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상황이 되고 보니 소속감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심리적 방패인지 알 수 있었다.


고시공부를 다시 시작하면서 하루는 더위도 피할 겸 학교 안에 있는 작은 서점에 들렀는데, 거기서 우연히 이 책을 발견했다. 잠깐 맛만 보려고 펼쳤다가 결국은 그날 오후 내내 이 책을 읽었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막판에는 다리가 너무 아팠지만, 책에는 그걸 견뎌낼만한 더 큰 위로가 있었다. 부모님도, 여자친구도 주지 못했던 위로를,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박민규라는 작가가 대신 전해주었다.


작품의 주인공은 중학교 입학을 코앞에 둔 인천의 평범한 소년이다. 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소년은 인천을 연고로 한 "삼미 슈퍼스타즈" 팬클럽에 가입하고, 꿈과 희망에 부푼다. 하지만 삼미는 82년 전기리그와 후기리그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기록적 패배를 당하며 주인공과 주인공의 절친 조성훈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남긴다. 83년도에 잠깐 반짝했던 삼미는 결국 84년도에도 치욕적인 패배의 기록을 남기며 85년 전기리그를 마치고 청보 핀토스로 이름을 바꾼다.


소년은 자신이 삼미의 팬이라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하고는, 삼미에 대한 애정을 버리고 일류대라는 신분을 얻기 위해 공부에 매진한다. 결국 주인공과 절친 조성훈은 나란히 명문대에 입학해서 원하던 신분을 갖게 된다. 주인공은 잠시 학생운동을 하고 사랑에 빠지기도 하지만, 결국은 졸업 후 대기업에 입사함으로써 사회에서 원하는 길을 걷는다.


삼미가 아니라 오비나 삼성처럼 살고 싶어 하던 주인공이지만 아내에게 이혼을 당할 정도로 회사에 모든 것을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IMF의 여파로 직장을 잃고 실의에 빠진다. 유산을 놓고 싸우는 친척들 때문에 환멸을 느끼고 도망치듯 일본으로 떠났던 조성훈은 이무렵 한국으로 돌아와 이혼과 해고로 실의에 빠져 있던 주인공에게 삼미 슈퍼스타즈의 팬클럽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해고 이후 오랜만에 넘쳐나는 시간을 누리게 된 주인공은 조성훈의 제의를 받아들여 삼미의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결성한다. 사회에서 보면 '루저'라고 불릴만한 이들이 모여 삼천포에서 전지훈련을 하며, "치기 어려운 공은 치지 않고, 잡기 어려운 공은 잡지 않는다."는 삼미의 야구철학을 완성한다.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차있던 그 시절, 이 책이 나에게 주었던 위로는 사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다. 세상 어느 누구도 주지 못했던 진실된 위로가 세포 하나하나에 퍼지는 느낌이었다. 이때 나는 처음으로 문학이 주는 감동이라는 게 무엇인지 가슴 깊이 깨달을 수 있었다.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현대는 타인이 나를 착취하지 않아도, 내가 스스로를 착취하는 사회가 되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다른 사람이 강요가 없어도, 좋은 대학에 가야해, 좋은 직장을 얻어야 해, 많은 돈을 벌어야 해,라는 강박을 만들어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현대인의 이와 같은 자기 착취을 비판하면서, 인생을 삼미처럼 살아가는 방법도 있다는 걸 유쾌하면서도 진지하게 알려준다. 



이병찬 변호사(제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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