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반려동물에게 뒤늦게 전하는 나의 안부 - 02. 회사
청이의 장례식을 치르고 바로 출근했다.
사정을 아는 주변에선 좀 더 쉬어야 하지 않느냐고 했지만 사실 그럴 명분이 없었다.
상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14년 동안 가족처럼 키우던 반려동물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루만이라도 몸과 마음을 추스릴 시간이 필요하니 출근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말했을 때 회사의 반응이 긍정적일 것 같진 않았다.
청이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일주일에 두 번씩 연차를 냈다. 사유는 회사에 알리지 않았다. 청이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당일 병가를 낸 적도 있었는데, 병가 사유에도 집안 사정이라 둘러댔을 뿐 반려동물이 아파서 결근하겠단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출근하니 인사담당자가 따로 불러 집에 혹시 안좋은 일이 있는지, 그렇다면 좀 더 쉬어야하는 건 아닌지 사정을 물었다. 그저 가족이 아파서 그동안 정신이 없었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인사담당자는 더 묻지는 않고 지금은 괜찮냐고 물었다. 나는 이제 괜찮다고, 말했다.
이제 괜찮다. 아마 그날 인사담당자에게 내가 한 거짓말 중 가장 최악의 거짓말이 아니었을지. 전혀 괜찮지 않았다. 청이의 부재를 매 순간 느낄 때마다 눈앞의 세상이 허물어졌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동시에 아무것에나 매달리고 싶었다. 요컨대 일상으로 복귀할 시간이 좀 더 필요했지만 반려동물의 죽음을 명분으로 하기엔 나 스스로도 회의적이었다.
제도권에서 승인한 가족 구성원이 죽으면 직계가족은 구성원의 장례를 치르고 심신을 추스릴 시간을 정당하게 얻는다. 하지만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보는 건 사실상 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에게나 심적으로 공감을 얻는 개념일 뿐, 사회에 동의를 구하긴 어렵다. 이 부분에 대해 내가 지나치게 비관적일 수도 있지만 그 당시엔 회사에게 이해를 바랄 수 없다는 판단이 더 강했고, 사실 지금도 그렇다.
설령 반려동물을 잃은 심적 고통이 가족을 잃은 것과 같다한들 감정의 총량은 늘 상대적이고 회사는 제도에 명시되지 않은 문제에 대해 배려해줄 의무가 없다. 비약하자면 반려동물의 죽음은 당사자에겐 가족의 죽음과도 같지만,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에겐 애인과 이별한 정도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애인과 헤어졌으니 회사를 쉬겠다고 하면 누가 이해해줄 수 있나.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청이가 떠난 후의 일이야 무슨 소용 있으랴 싶었다. 내가 붙잡고 싶은 건 청이가 아팠을 때, 청이가 죽기 전의 시간들 뿐이었다. 일을 관두고 청이와 더 있지 못한 그 시간들이었다.
왜 일을 그만두지 않았을까. 청이에 비하면 그 외의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진작 일을 관두고 청이 간호에 전념했다면, 그랬다면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혹여 누군가 반려동물이 심각하게 아프다고 한다면, 그래서 회사와 반려동물의 간호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면 주저없이 회사를 그만두라는 무책임한 말은 할 수 없다. 고백하자면 나는 자취를 하고 있지 않고 당장 월급이 없으면 다음 생활을 기대할 수 없는 처지가 아니다. 그저 금방 재취업할 수 있을만큼 노동시장에서 값어치 높은 노동자는 아니었을 뿐이다.
하지만 청이가 아팠을 때 곧장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던 내 자신을 후회한다고, 사무치게 후회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청이가 떠나기 전엔 일말의 미련과 불안감으로 붙잡고 있던 것들이 청이가 떠난 후 정말 아무래도 상관 없어졌다. 더는 느낄 수 없는 청이의 존재에 비하면 그것들은 정말 그 따위라고 거칠게 폄하해도 괜찮은 것들이었다.
삶을 반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같은 상황으로 돌아와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때도 후회했을 거라고 누군가 말했다. 부정할 순 없었다. 후회란 늘 만약이라는 헛된 상상을 동반하니까. 내가 회사를 그만 뒀어도 청이는 결국 떠났을 수도 있고, 그랬다면 나는 이직의 부담과 청이에 대한 슬픔의 이중고를 겪었을 수도 있다. 요컨대 지금의 선택이 최악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런 생각들이 얼마 간은 죄책감을 동반한 후회에서 나를 구원해 주다가도, 또 얼마 간은 예의 ‘그 따위’것들이 지금 와서 다 무엇이냐고 후회한다. 돈을 벌어도 청이에게 맛있는 간식 하나 사줄 수 없고. 청이가 종종 쓰던 스크래쳐 하나 사줄 수 없는데. 삶의 좌표 중 하나를 잃은 내게 회사란 그저 견뎌야 할 일상 중 하나가 됐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