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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자 Feb 06. 2020

01 진동



바다인지 강인지 호수인지 모를 초록의 물줄기를 끼고 자리 잡은 흙색 도시. 허물어진 성벽과 원형 경기장이 들어선 도시의 심장으로부터 거미줄처럼 뻗어 나간 길을 따라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모여 산다. 나는 언제나처럼 버스 위에서 턱을 괴고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또 이곳에 왔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다. 버스가 커다란 원을 그리며 이제는 퇴색한 낡은 시가지의 가장자리를 휘돌아 지나간다. 어깨 너머로 고개를 돌려 성벽과 원형 경기장과 흙빛의 거리가 스쳐 가는 모습을 한참이나 쳐다본다.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온 후끈한 바람의 감촉을 느끼며, 그 모든 장면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버스에서 내려 머무르는 곳은 시가지에서 벗어나 있다. 물리적으로 멀지 않은 위치인데 버스를 타고 한참이나 이동하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진다. 기억 속 지도 위에는 거미줄로 촘촘히 채워진 커다란 원의 왼쪽 가장자리에 젓가락처럼 두 개의 골목이 나란히 서 있는데 그 더럽고 복잡한 두 가닥의 골목에 세계 곳곳에서 흘러든 뜨내기들이 모인다.


근처에는 선착장이 있다. 그곳에서 페리를 타면 박물관과 미술관이 모여있는 섬에 닿을 수 있다. 이 섬에는 나무가 많아 그늘에 서면 시원하고 향기로운 바람이 느껴진다. 박물관과 미술관 건물 앞에 폭발하듯 피어오른 붉은 꽃나무에서 흘러온 것이다. 다시 이곳, 붉은 장미의 섬이다.


그리고 여긴 꿈속이다.



"제가 왜 여기 있는 거죠?"


"네가 오고 싶어 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적 없는데요."


"설마 아직도 생각의 주인이 너라고 생각하는 거야?"


"무슨 말이에요?"


"생각은 네가 하는 것이 아니야. 생각이 너의 머릿속에 드는 것이지."


"생각에 의지가 있다는 말인가요?"


"비슷해. 대부분의 생각은 그저 흐르지. 굳이 네 머릿속에 자리한 이유가 있을 거야."


"어렵네요."


"나중에 이해하게 될 거야. 그나저나 붉은 장미를 보러 갈 거야? 그렇다면 날 따라오고, 아니라면 그대로 눈을 감고 백까지 세면서 기다리도록 해."


"그런데 지금 내게 말하고 있는 당신은 어디에 있는 거죠? 왜 나는 당신의 모습을 볼 수 없죠? 그러고 보니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군요. 어째서 나는 당신이 하는 말을 알아듣고 있는 거죠? 당신은 뭐예요?"


"그 또한 나중에 저절로 알게 돼. 지금은 어떤 설명도 납득이 되지 않을 테니 넘어가자. 그나저나 넌 지금 눈을 감고 있어. 먼저 눈을 뜨도록 해. 꽉 쥔 주먹도 이제 그만 풀어도 좋아."



눈을 떴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눈을 뜬 것을 보니 준비가 됐나 본데."


"내 안에서 무언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어요. 강한 진동이 느껴져요. 이건... 이건..."


"네가 발을 딛고 선 거대한 구체가 엄청난 속도로 뱅뱅 돌고 있는데 당연하지. 그 속도가 무려 초속 사백..."



띵. 띠링. 띵. 띠링.



눈을 떴다. 블라인드 사이로 비추는 희끄무레한 빛, 하얀 천장, 포근한 이불. 손바닥에 선명하게 박힌 손톱자국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생생한 기시감이 몰려왔다. 또 붉은 장미의 섬에 다녀왔다. 실재하지 않는 곳이다. 더 자세히, 더 선명하게 기억해내고 싶지만, 이 정도만 해도 굉장히 노력하여 얻은 결과이다. 꿈속의 나는 대체로 그곳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가끔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기도 하고, 모르고 있을 때도 있다. 여러 번 가 보았기 때문에 이제는 꿈을 꾸고 있지 않을 때도 구석구석의 장면들을 대충 그려볼 수가 있을 정도가 되었다.


휴대폰을 쥐고 메시지들을 확인하는 동안 꿈속의 목소리가 들려준 이야기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떠나갔다. 간신히 붙잡아 둔 몇 마디를 서둘러 메모장에 적었다.


아침부터 핸드폰이 쉬지 않고 울려 대는 통에 아침잠을 놓쳤으니 오늘 하루는 이미 실패다. 눈을 끔벅이며 지난 밤을 떠올렸다. 집에 오는 길에 몸이 아프겠구나 싶더니만 이내 망치로 머리를 두드리는 듯한 두통이 찾아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져 버렸고 형태를 바꾸며 꿀렁꿀렁 요동치는 어둠 속에서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여전히 눈꺼풀에 남아있는 압도적인 잠의 무게 앞에 무릎을 꿇고 손바닥이라도 싹싹 빌고 싶었다. 내 몸과 마음은 당신의 것이라고. 아침잠을 제대로 자지 않으면 영 시무룩해지고 만다. 그래서 아침잠을 포기해야 했던 지난 며칠 간은 종일 심장이 몇 차례나 쿵쿵 내려앉는 바람에 기운을 많이 썼다. 내려앉은 심장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는 일에 말이다. 공들여 심호흡을 해야 하고, 몸에 익어 노력하지 않아도 나오는 행동과 말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에너지가 바닥나기 시작했다. 충전이 필요하다.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올리고 발끝에서부터 서서히 힘을 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와 분리되었다. 초록색의 빛과 함께 나를 포함한 장면이 퍼즐 조각처럼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조각이 둥실 떠올라 이곳저곳을 흘러 다니는 동안 마찰하고 진동하는 모든 것들이 내는 소리, 다정하고 따뜻한 감촉, 익숙하여 그리운 느낌들로부터 점점 멀어졌다. 조각은 그대로 내가 되어 새카만 우주 공간이나 깊은 바닷속을 유영했다. 이마 위로 초록색 돛단배와 초록색 해파리가 떠올랐다. 


그렇게 한참이나 좋은 기분에 집중하다 몸을 말아 돌려 눕는 순간 뇌수가 출렁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젤라틴 덩어리 같은 것이 머리 안을 휘저었다. 눈앞에 보이는 장면은 커다란 원을 그리며 빙빙 돌았다. 빈혈인가? 덜컥 겁이 나서 눈을 질끈 감았다. 눈꺼풀 안쪽에서 눈동자가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토할 것 같다. 뇌졸중? 이렇게 죽는 건가? 요동치는 젤라틴 덩어리는 멈출 줄을 몰랐다. 거꾸로 매달려 시계추처럼 진자운동을 한다 해도 이처럼 어지럽지 않을 것이다. 용기를 내어 반대편으로 돌아 누웠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지럼증은 사그라들었다. 다시 고개를 돌리면 젤라틴 덩어리가 머릿속에서 폭동을 일으킬 것이 분명했다. 온몸에 석고 붕대를 감은 사람처럼 꼼짝 않고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돌아누울 때 어지럼증'


비슷한 증상을 겪은 사람들의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들이 휴대폰 화면에 정렬되었다. 이내 나를 습격한 어지럼증의 정체가 드러났다. 


이석증. 이석증이다. 틀림없다.


미세한 돌멩이가 귓속을 돌아다니며 평형감각을 흐트러뜨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오후에 예정된 중요한 미팅이 떠올랐다. 일어나야 한다. 상체를 천천히 일으켜 세워 보았다. 머릿속은 다행히 잠잠했지만, 어지럼증의 여파로 뱃속에 든 모든 것들이 덩달아 요동치는 바람에 토할 듯한 기분은 여전했다. 이런 상태로 미팅에 참석했다가 오히려 일을 그르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치자 그제야 이 상황이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오늘 미팅에 나갈 수가 없겠어요. 죄송합니다. 


동료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다시 몸을 뉘었다. 발작 같은 어지럼증이 다시 이어졌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다시 휴대폰을 쥐고 이석증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나는 이미 증세에 대한 진단을 마친 상태였다. 그것이 '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까지 별안간 떠올랐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틀 전 눈을 감고 누워 잠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오른쪽 귓가에서 얕은 숨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비교적 짧게 반복되는 틀림없는 숨소리였다. 숨을 참아도 그 소리는 정확한 박자로 이어졌다. 내 코와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워 숨소리가 잦아지기를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고, 이틀 뒤 지금 내 귀 안에 작은 돌멩이가 돌아다니며 신경을 흥분시키고 있다. 빌어먹을.


최근 시작한 새로운 프로젝트가 큰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매일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주제로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특히 이른 아침부터 하루를 시작해야 했던 그 며칠이 정말이지 견디기 힘들었다. 이렇게 쓰고 나니 내가 몹시 예민하고 까칠한 성격의 소유자인 것처럼 보일 것 같아서 미리 해두는 말인데, 나는 대체로 낙관적이고 무던한 편이며 건강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다. 몸에 밴 우울과 슬픔의 냄새 같은 것도 없고, 어지간한 일에는 화를 내지도 않는다. 하루하루가 저마다의 이유로 재밌고 즐겁다. 삶을 긍정하는 주문이나 자기 암시는 물론 아니다.


그런 나도 견딜 수 없는 특정의 상황에 노출되면 맥없이 무너지고 마는데 '아침잠 없는 삶'이 바로 그것이다. 정직한 몸은 이에 바로 반응한다. 소화 기관이 기능을 멈춘다거나 면역력이 급격히 약해진다거나. 이 환장할 어지럼증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이 프로젝트가 끝나고 한동안 무엇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쉬면 괜찮아질 것이다.


다음 날 찾아간 동네 이비인후과 의사가 내린 진단도 예상했던 대로였다.


"증상을 봐서는 이석증이네요."


그는 좀 더 정확한 진단을 위해 몇 가지 검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별말 없이 그가 건넨 커다란 고글을 받아 쓰고는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상상했지만, 창문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은 오히려 기괴했다. 미래적이기도 하고. 그는 잠자코 기다리던 나의 머리통을 두 손으로 감쌌다. 불길했다. 설마...


"자, 누워 보겠습니다. 하나, 둘, 셋!"


그가 내 몸을 뒤로 홱 눕히자 곧 절망이었다. 숨을 쉬고 눈을 뜬 채로 이런 어지럼증을 견뎌야 한다는 말인가? 차라리 정신을 잃고 싶었다.


"어지럽죠?"

"네, 죽을 것 같아요. 살려주세요."


어지럼증이 잦아들자 그는 다음 액션을 준비했다. 나는 속으로만 비명을 지르고 또 질렀다.


"자, 이렇게 하면 어때요?"


이번엔 누워서 좌우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마다 내 눈동자는 여지없이 뱅뱅 돌았고, 의사는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어 고글 속 내 눈동자의 흔들림을 관찰했다. 눈을 질끈 감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그 과정은 좀 치욕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치료는 계속되었다. 나는 의사가 시키는 대로 데굴데굴 구르며 귓속을 돌아다니고 있는 돌멩이를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오늘의 물리치료가 효과가 있는지 좀 더 지켜보기로 하죠. 내일모레 다시 오세요."


사실 치료 중에 이미 결심했다. 의사의 역할은 여기까지라고. 병원에는 다시 가지 않았고, 처방해 준 안정제도 먹지 않았다. 일상생활에 큰 불편은 없었다. 일어나 걸을 때는 별로 어지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타민 D가 부족하면 이석증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는 인터넷 기사를 읽은 엄마가 챙겨 먹으라며 건넨 영양제에는 좀처럼 손이 가지 않았다. 다만, 덜컹거림이 신경 쓰여 되도록 버스보다 지하철을 이용했고,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려 밥은 아주 조금씩만 먹었다. 자리에 눕거나 고개를 돌릴 때마다 기체조 수련자처럼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숨을 쉬는 일조차 조심스러워하며 외부 자극에 대해 몹시 예민한 사람처럼 며칠을 지내다 보니 실제로 어지럼증은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마침내 돌멩이가 제자리를 찾아 돌아간 것이다.


그리고 며칠 뒤 진동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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