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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자 Feb 06. 2020

02 첫 번째 이탈



어지간해서는 집에서 일하지 않는다. 혼자 있는 시간에는 내 안에 차오르는 샘에 오로지 집중하고 싶기 때문이다. 새벽이면 차갑고 투명한 물이 찰랑이며 온몸을 연결하는 관과 곳곳에 뚫린 구멍마다 들어차 쌓인 먼지와 때를 씻어 낸다. 가끔은 코와 입이 아닌 피부로 숨을 쉰다. 양서류의 축축하고 끈적한 피부를 통해 부드러운 들숨과 날숨이 오가는 것처럼. 피부로 숨을 쉴 때는 털이 바짝 서고 목덜미에서 시작하여 허벅지까지 몇 차례 소름이 싸르르 돋는다. 그렇게 온몸을 부르르 떨고 나면 피로감이나 긴장이 몸에서 떨어져 나온다. 완전한 이완. 그제야 온몸에 얼마나 힘을 주고 하루를 보냈는지 깨닫는다. 휴식이니 힐링이니 요란 떨 필요 없이 편안한 숨이나 제대로 쉬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러나 집에서는 철저하게 쉬고 말겠다는 생각은 언제까지나 다짐일 뿐이고 쉬고자 하면 쉬는 시간, 일하고자 하면 일하는 시간인 것이 프리랜서의 삶이다. 이석증이 생긴 이후 쭉 컨디션이 좋지 않아 예정에 없던 여유를 부리는 바람에 일이 밀리고 말았다. 마감일까지 원고를 마무리하려면 꼼짝없이 책상 앞에 붙어 있어야 한다. 산만한 정신을 붙잡아 둘 음악을 정성껏 골라 재생 목록에 저장하는 의식을 치르며 작업은 시작됐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도 형편없는 집중력은 정성껏 고른 음악 외에도 많은 조건을 필요로 한다. 이런 걸 두고 쓸데없이 까다롭다고 하나? 적당한 조명과 온도, 따뜻한 차와 달달한 간식 같은 것을 준비하고 나서야 키보드 위에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원고를 쓰는 일은 머릿속을 비워야 하는 명상과 비슷하다. 떠오른 생각을 글로 옮겨야 하는데 어째서 머릿속을 비워야 하는 걸까 싶지만, 비워야 생각이 든다.


생각은 네가 하는 것이 아니야. 생각이 너의 머릿속에 드는 것이지.


붉은 장미의 섬에서 만난 목소리가 글자가 되어 머릿속을 떠다녔다. 단어를 고르고 손가락을 놀리는 일보다 머릿속을 비우는 일이 훨씬 더 어렵다. 머릿속을 비우고 나서도 되도록 '생각 없음'을 유지하는 편이 좋다. 많은 생각은 더 나은 원고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나의 생각이 다른 사람의 생각과 일치할 확률은 0에 가깝고, 고민의 시간이 길어진다고 해서 내게 원고를 의뢰한 사람의 만족이 커지는 것도 아니다. 복잡할 것 없다. 이 작업은 마감, 그저 마감을 향한 고독한 레이스에 가깝다. 


마감이란 시간과 노력을 헌사하고 '당분간의 평안한 마음 상태'를 얻는 일이다. 그 마음 상태란 마감할 원고가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 주는 짧은 쾌감이다. 물론 일시적이다. 다음의 일, 다음의 원고가 기다리고 있으니 길게는 며칠, 짧게는 고작 하루의 여유일 뿐이다.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멋진 카페에서 향긋한 시간을 보내는 등 그 여유를 무엇으로 채우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 순수한 쾌감의 본질은 마감 그 자체가 선사하는 잠깐의 '없음'에 있기 때문이다. 이 쾌감은 중독성까지 있다. 마감 중독.


몇 차례 고비를 겪었지만, 새벽 다섯 시를 넘기고 무사히 원고를 마무리했다. 노트북을 덮고 따뜻한 물을 마시고 딱딱하게 굳은 어깨를 몇 차례 돌리고는 귓속의 돌멩이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침대에 누웠다. 느릿느릿 머리맡에 펼쳐진 읽다 만 책들을 뒤적였다. 이 책 저 책 옮겨가며 몇 장씩을 읽다 보니 눈이 감겨 왔다. 캔들 워머의 스위치를 올렸다.


잠이 쏟아질 것을 기대했지만, 어느덧 내 눈은 눈꺼풀 위를 둥둥 떠다니는 빛의 입자를 좇고 있었다. 오히려 신경을 곤두세우고 잠의 시작을 기다렸다. 의식과 무의식이 공수를 교대하는 그 순간을. 그 순간에 무슨 일어나는지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고3 때는 가위눌림에 꽤 시달렸다. 매일 밤 귓가에서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지금 생각해보면 적잖이 소름 끼치는 일이지만, 좀 시끄럽다고 여겼을 뿐 그게 별로 무섭지 않았다. 비명이 들리면 정신이 깨어있는데도 몸이 움직이지 않는 가위눌림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가위눌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그것이 반복되면서 피로함을 느껴 나중에는 포기하고 말았다. 몸을 움직이려고 발버둥치지 않고 잠시 기다리다 다시 잠을 청하는 것이 나의 방식이었다.


몇 차례 목소리가 형태가 되어 나타나면서는 가위눌림을 공포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수험생 조카가 걱정스러웠던 나의 이모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나를 괴롭히는 보이지 않는 존재를 내쫓으려 열심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둘째 이모는 어느 날 찾아와 나를 침대 위에 앉혀놓고는 두 손을 꼭 붙들고 한 시간 넘게 통성 기도를 했는데 이모의 목소리가 어찌나 우렁찬지 정말 내 방에 귀신이라도 있는 거라면 도망가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막내 이모는 용하다는 도사가 그렸다는 달마도를 들고 와서는 매의 눈을 하고 내 방 구석구석을 살피더니 침대 시트 밑에 고이 접어 넣었다. 또 다시 가위에 눌리면 달마의 미소를 떠올리라나? 둘 중 어떤 방법이 효과가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과연 가위눌림의 빈도는 점차 줄어들었다.


빈도가 줄어들면서 가위눌림의 시작과 끝을 나름 선명하게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끝나는지, 몸과 정신의 상태가 어떨 때 이 현상이 나타나는지 등등. 가위눌림의 시작에는 대체로 생생한 진동이 있었다. 가만 생각하니 '생생하다'라는 표현은 어색하다. '생생하다'는 말은 보통 현실이 아닌 상황이 현실처럼 느껴질 때 쓰니까. 몸 안에 어떤 에너지가 빠르고 강하게 진동하는데 실제로는 몸이 진동하는 것 같다. 진동은 머리 안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휴대폰 진동과 비슷하다. 귓가에는 휴대폰 진동음 비슷한 소리가 들린다. 소리는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온몸에 감각이 사라진다. 몸을 덮은 이불의 감촉도, 배 위에 살포시 올려놓은 두 손의 무게도, 뒤통수를 받치고 있는 베개의 폭신함도 서서히 멀어진다. 몸 어느 구석에서도 마찰이나 중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대로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 그리고 곧 의식이 날카롭게 깨어난다.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다.


빛의 입자가 그리는 그림에 집중하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귓가에 진동음과 함께 익숙한 자극이 느껴졌다. 진동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진동이 형태를 달리하고 있다. 익숙한 진동을 넘어 내 안의 무언가가 배꼽을 축으로 하여 팽이처럼 빠르게 돌았다. 그에 맞춰 소리도 달라졌다. 휴대폰 진동음이 아니라 휘잉 휘잉 육중한 무언가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가까웠다. 나는 돌고 또 돌았다. 안돼. 멈춰. 이러다가 어지럼증이 다시 나를 덮칠 거야. 귓속의 돌멩이를 떠올렸다. 이석증의 증상인가? 그러나 어째서인지 어지럽지 않았다. 이렇게 하늘로 날아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회전 속도가 빨라질수록 의식은 점점 더 또렷해졌다. 나는 이 상황을 기다려왔던 것처럼 회전하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온몸이 룰렛 테이블 위에 고정된 채로 뱅뱅 돌고 있는 나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 순간 의지와 상관없이 무언가가 끌어당기는 듯 상체가 들려졌다. 몸이 아닌 내 안의 무언가가 일어나 앉았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게 뭐지?


찰나의 기묘한 감각을 확인한 후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반듯하게 침대에 누워 있었다. 처음으로 경험한 유체이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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