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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자 May 19. 2020

독립, 독립, 독립! 2

Seoul, Korea, 2020 봄



야매 영성가의 도발적인 유럽 수도원 기행, <배낭영성> 텀블벅 펀딩 후원하기!



집에서 나올 때 비가 오지 않으면 좀처럼 우산을 챙기지 않는다. 여기에 이유 같은 건 없다. 우산은 비가 올 때 사용하는 물건이니 비가 오지 않을 때는 필요가 없을 뿐이다. 반면 몇 시간 뒤 기상 상황에 대비하여 우산을 챙겨 나가자고 결정하는 데에는 많은 이유와 의도가 필요하며, 그걸 따지는 일이 내게는 피곤하다. 그렇다고 조금 비를 맞는 것 정도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조차도 아니다. 오히려 못 견디는 편이다. 여러모로 모순이 많은 인간이다. 혼자 있고 싶지만 곧잘 외로움을 타는 것 포함해서.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비가 온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맨손으로 나왔다. 땅 가까이 내려앉은 먹구름이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듯 묵직했다. 커피 마실 시간이 충분히 남아 카페에 들어가 30분 정도 책을 읽었다. 중간중간 고개를 들어 창밖을 확인할 때마다 하늘색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 정류장까지 이동하는 동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편의점이 보였지만 지나쳤다. 버스에 올라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에서 양동이로 물을 들이붓는 것처럼, 마침내, 비가 쏟아졌다. 이토록 큰 비는 참으로 오래간만이었는데 그게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꼭 재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수평선에서부터 진격해오는 쓰나미를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해변 휴양객의 시점이랄까. 버스 안에서 시커먼 먹구름과 거센 빗줄기를 바라보는 내 마음이 꼭 그랬다.


이제 꼼짝없이 물벼락을 맞게 생겼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 내릴 준비를 하고 선 버스 안의 사람들, 모두의 손에 우산이 들려 있었다. 어쩜 모두 빠짐없이 우산을 챙겨 나왔구나, 새삼 애틋했다. 이제 버스에서 내려야 할 시간이 되었다. 목적지까지는 200m 정도 달려야 했고, 중간에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버스 정류장 길 건너편에 편의점이 있어 잠시 고민했지만 다시 지나치기로 했다. 우산을 사기 위해 길을 건너는 동안 어차피 비를 맞아야 한다면 그냥 우산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맞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가방을 가슴에 안고 잠시 달렸고, 이내 멈추어 걸었다. 다만 물웅덩이를 피하느라 이리저리 펄쩍펄쩍 뛰었다. 그건 진짜로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이번에는 재난 영화 말고 하이틴 로맨스 같은 것.


바람까지 세차게 불어서 온몸에 빗줄기가 철썩철썩 들러붙었다. 빗방울이 어찌나 무겁고 단단한지 얼굴에 와 부딪힐 때는 뺨이 얼얼할 정도였다. 온몸이 신나게 다 젖었다. 도착하여 엘리베이터로 뛰어 들어가 거울 안에 쫄딱 젖은 내 모습을 보는데 어쩐지 아주 속이 시원하였다.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눈으로 입으로 빗물이 여전히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는 이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생각이 흐르는 모든 통로가 꽉 막혀 몇 날 며칠 아무리 글을 쓰려고 노력해도 쓸 수가 없었는데 말이다.


나는 아마 앞으로도 좀처럼 우산을 챙기는 일이 없을 것이다. 겉옷을 챙기지 않을 것이고, 미리 끼니를 챙겨 먹지 않을 것이고, 두통이나 생리통이 찾아오기 전에 미리 진통제를 챙겨 먹지도 않을 것이다. 비가 오면 맞고, 추우면 떨고, 허겁지겁 끼니를 챙기고, 아플 때마다 이런 아프구나 하겠지. 배고플 예정이니, 추울 예정이니, 늙을 예정이니, 아플 예정이니, 죽을 예정이니, 그놈의 숱한 예정들은 앞으로도 계속 하찮은 것으로 여길 것이다. 뛰어가나 걸어가나 어차피 비에 젖기 때문이다. 대수롭지 않다.


원래는 도서출판 춘자의 두 번째 책, 피터님의 <배낭영성> 텀블벅 펀딩을 홍보하는 글을 쓰려고 했는데, 비를 쫄딱 맞고 글이 이렇게 튀어나와 막을 길이 없었다. 여름의 계획을 모두 취소하고 꼼짝없이 서울에 갇혀 있게 되어 가슴을 짓누르는 돌덩이와 함께 눈을 뜨고 눈을 감는 요즘이었다. 어제 비를 맞고 흐름이 달라졌음을 느낀다. 무언가 비와 함께 흘러갔고, 무언가 비와 함께 들어찼다. 비를 맞는 일이 너무 기뻤다.


지금 해야 할 일들은 모두 하고 싶은 일이다. 그건 축복이다. 나는 대충 하지 않는다. 열심히 한다. 그건 즐거움이다. 일인출판을 하겠다고 나서자마자 어디서도 보지 못한 글을 쓰는 작가님들의 원고를 손에 쥐게 되었다. 행운이다. 그들의 글을 책으로 만들게 된 일이 내게 행운이듯, 내 손에 원고를 맡기게 된 일이 그들에게도 행운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다.


펀딩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 끝은 독립, 독립, 독립이다. 뛰어가나 걸어가나 비에 젖는다.



그래서, 다시!


야매 영성가의 도발적인 유럽 수도원 기행, <배낭영성> 텀블벅 펀딩 후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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