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수레가 요란하다
여러 회사를 다녔지만 최근에 깨달은 흥미로운 일하기 방식이다. [이전 브런치에서 언급한 직장과 또 다른 곳으로 옮겼다.] 경력은 있지만 여전히 신입이고 구석진 자리에 앉아 최대한 조용히 숨만 쉬며 일하는 중이다.
새 회사 분위기에 적응하고, 던져진 일을 처리하기 급급해 다른 사람이 일 하는데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업무가 익숙해지자 숨을 돌릴 타이밍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파티션과 모니터를 넘어온 소리가 귀에 꽂힌다. 이 소리는 대체로 두 가지였다. 키보드 그리고 혼잣말.
키보드 소리
사무직이라면 하루 종일 듣는 소리인데 키보드 소리가 뭐가 특별하나 의문이 들 것이다. 타자 소리를 듣고 있으면 업무 키보드 소리와 메신저를 하는 소리는 다르다는 것을 금세 느낀다. 키를 가볍게 탁탁 치는 리듬감과 두드리는 세기 등이 매우 다르다. 경쾌하고 짧게 탁탁 그리고 탁. 엔터까지. 한 없이 가벼움과 신나는 리듬이 들어가 있다. 이건 바로 친구와 잡담을 하는 메신저 소리다.
이 소리를 모두가 아는 줄 알았다. 그러나 상사는 몰랐다. 미친 듯이 키보드를 열정적으로 연주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 상사는 ‘OO 씨 바쁘니까, AA(나)씨가 이것 좀 해’라고 자연스럽게 일이 토스된다.
그렇게 파도처럼 나에게 몰려온 일은 내 정신을 반쯤 휩쓸고 지나갔다. 나는 무소음 마우스와 키보드 스킨을 사용하던 것을 바꿔야겠다고 조심스레 다짐했다. 키보드 소리는 요란하게 전화는 길고 부산스럽게 마우스도 딸깍딸깍.
OO 씨의 주특기는 키보드 연주와 혼잣말이었다. 키보드 소리는 참을 수 있었지만 혼잣말만큼은 참기 어려웠다. 당시의 나는 신입의 마인드로 시키는 일을 재빠르게 처리할 수 있게 귀를 바짝 세우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아냐, 아냐 이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하자
라고 말하길래 깜짝 놀라 쳐다봤더니 혼잣말이 이었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바로 상사에게 ‘이게 더 괜찮지 않아요?’라고 물어줘야 완성이 된다. 상사의 일이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끊임없이 물어보며 내가 일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같은 일을 해도 아니 일을 덜해도 상사는 그 사람이 바쁘다고 인지하고 있다.
아, 물론 마지막엔 상사의 의견은 0에 수렴하며 ‘이걸로 해야겠다’라고 혼잣말 종지부를 찍는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부서 이동으로 인수인계를 받고 나니 OO 씨의 일이 별일이 아님이 더더욱 확실해졌다. 5분이면 끝날 일을 1시간 동안 끄는 기적을 보였던 거다. 적당히 메신저 키보드 배틀을 하다가 마우스 스크롤을 한 두 번 정도 내리고는 ‘이게 아닌데’라며 고민하는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후에 다른 직원으로부터 OO 씨는 ‘하는 것도 없으면서 바쁜 척하는 애’와 ‘할 줄 아는 거 없잖아’라는 혹평을 전해 들었을 때 다들 알고 있었구나라는 충격에서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다. 안 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모두가 보고 있었다.
나만 OO 씨의 월급 루팡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건 어마어마한 착각이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바보도 아니고 모를 리 없었다. 나는 무소음 마우스를 연결하고 키보드 스킨을 다시 조심스레 씌우고 퇴근을 향해 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