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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화 Feb 20. 2019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할까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만나지 말자

방금 춤을 추다 끝난 사원의 토로. 


상사 본인도 업무 이해를 못하고 두루뭉술하게 지시를 내려 헛수고를 할 때의 허무함. 이런 경우 어느 장단에 맞춰서 춤을 춰야 할지를 모르겠다. 정말 오늘 같은 날은 칼춤 추고 싶어 진다.


사건의 전말은 대개 이러합니다.


팀장이 지시한 업무의 설명을 잘 듣고 A 안을 기획합니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은데 안 보여주고 구두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메모를 열심히 합니다. 팀장의 말에 따르면 클라이언트 쪽에서 원하는 목적이 확실하기 때문에 제한된 조건 속에서 아이디어를 기획합니다. 머리를 쥐어뜯고 아이디어를 쥐어 짜내 상사에게 기획안을 전달합니다. 


“아니 내가 말한 건…”


어차피 이럴 줄 알았기 때문에 말이 끝날 때쯤에 B안도 스리슬쩍 냅니다. 결론은 두 개를 섞어서 새로운 기획안 C를 제출합니다. 팀장의 평소 패턴을 생각해 A 안은 폐기하지 않고 내 문서에 고이 저장합니다.


최종보고를 받는 상사와 미팅을 합니다. 팀장의 의견이 덧붙여진 기획안 C 발표를 마칩니다. 최종 보스는 “한 마디 덧붙이자면….”으로 시작해 열 마디를 덧붙입니다. 옆에서 팀장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최종 보스의 얘기를 듣고 있으니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어금니를 꽉 깨물게 됩니다. 최종 보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기획안 A였습니다. 그러나 하찮은 사원은 “말씀해주신 의견 반영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고개를 살짝 돌려 옆에서 끄덕 인형이 된 팀장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최종 보스가 떠나고 팀장은 “그러게 내가 그렇게 하라고 했잖아”라고 조언을 덧붙입니다. 여기서 그렇게는 다시 봐도 A안입니다. 울컥 화가 치밀었지만 아직 A 안을 폐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문서에서 꺼내 다듬어서 다시 올립니다. 아이디어 D도 넣었습니다.


팀장은 다시 검토하더니 아이디어 D는 빼고 아이디어 E를 넣으라고 합니다. “이건 이렇게 제안하자”라며 말하고 강요라고 씁니다. “알겠습니다”라고 답한 힘없는 사원은 자리로 들어가 책상 한편에 놓인 인형을 꽉 쥡니다. 처음에 말하지 클라이언트 미팅을 앞둔 하루 전에 말해 일을 두 번, 세 번, 다섯 번 다시 합니다.


클라이언트 미팅에서 기획안을 쭉 설명합니다. 클라이언트가 기획안을 검토하는 순간이 가장 떨립니다. 그리고 모든 회의가 끝나고 팀장은 아이디어 D로 진행하자고 말합니다.


멘틀이 바사삭 부서졌지만 빨리 수습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야근이 몰려올 테니까요. 팀장의 잔소리는 덤입니다. 오늘도 사원은 장단에 맞춰 춤을 추겠다며 기획안 A, B , C를 만들며 칼퇴를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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