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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CY Apr 06. 2016

부끄러운 날

어른이 된다는 것


 오랜만의 글이다.

 한 동안 글을 쓰고 있었으나 쓰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주어진 일이 벅차 쫓겨 살다보니 생각들이 비집고 나올 틈새가 없었다. 공연 대본을 썼다. 사람들 틈새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집에 가서 고쳐 쓰고 다시 다음 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 대본 안에 갇혀서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는 편이 맞겠다. 몇 번이고 끄적여 보았으나 틀에 박히거나 나답지 않은 얘기들 뿐이었다. 누가 봐도 의무감에 억지로 쓰는 듯한 얘기들. 가차 없이 삭제를 눌렀다. 내가 아니고, 나답지 않다.


 아르바이트 덕분에 양산이라는 곳에 다녀왔다. 그 곳을 간 내내 나는 안개 속을 걷는 기분으로 살았다. 그 전 주에 하루 두시간 남짓을 자면서 쌓인 피로와 적응이 되지 않는 도시의 기운. 일이 끝나도 일인 덕분에 하루의 24시간이 모자라다가 10년간 써온 노트북이 다운 되는 바람에 작은 여유를 얻었다.


 노트북을 접고 카페에서 나오다 보니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군대고, 119 구급대원 여럿이 모여 있었다. 엘리베이터 고장으로 아이 하나가 안에 갇혀 있는 모양이었다. 아이의 엄마가 외쳐댔다.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어.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거야."

 태연하게 들리는 그 목소리와는 다르게 엄마의 표정은 흔들리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라,는 그 말이 나를 멈춰서게 했다. 엄마는 계속 그 말을 외쳐댔고, 아이는 쉴 새 없이 절규했다. 초등학생의 아이가 견뎌내기에 죽음의 공포는 너무 큰 것이리라. 맞은 편의 엄마도 마찬가지였겠으나 그녀는 엄마이기에 두려움을 내비칠 수 없었을 뿐이다. 엄마의 존엄함을 느끼며 건물 밖으로 나와 담배를 물었다. 씁쓸했다. 혹은 괴로웠던가.

 

 "가만히 있어."


 그 말이 가슴을 베어 왔던 것은 엄마가 했던 그 말과 지난 4월의 그 말이 같지만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을 두드리고 울며 절규하던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며 어른인들 저 상황 속에서 다를 수 있을까란 생각이 스쳐갔다.

 죽음의 공포를 맞닥뜨린 아이들에게 뱉어낸 그들의 생각 없는 말과 그녀의 말은 의미 자체가 다르다.


 못 할 짓이다. 그 엄마에게는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못할 짓이었을 것이고, 세월호의 그들에겐 못할 짓이라기 보다는 몹쓸 짓이라는 표현이 맞겠다.

 

 이럴 때면 늘 드는 생각은 과연 '어른'이란 무엇일까, 라는 것. 주민등록증이 나오고, 담배도 필 수 있고, 운전도 할 수 있고, 술 마시고 네 발로 걸어 다닐 수 있다고 해서 혹은 나이 좀 먹었다고 어른이고, 존중하고 따라야 할 존재일까?

 나이가 먹을 수록 생각이나 행동은 깊어져야 하는데 현실은 많이 다르다. 소위 '꼰대' 같은 사람들이 대다수임을 알게 된 순간부터 나는 궁금해졌다. 어른이 되고, 나이가 먹는다는 것은 꼰대가 되는 지름길인걸까?


 절대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어른이 되었음에도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


 지난 4월의 그들이 자기 자식이 그 안에 있었다면 그리 말할 수 있었을까. 자신들이 먼저 구명조끼를 입고 나올 수 있었을까. '어른' 명찰을 달고 내뱉은 그 말에 단 한 줌의 부끄러움이나 책임감도 없었을까.


 아이가 울면서 나왔다.

 다행히 엘리베이터 속의 아이는 구조 되었다.

 아직도 차디찬 물 속에 있는 아이들을 떠올리니

 부끄러움과 슬픔이 동시에 밀려온다.

  

 과연 나는 이 땅에서

 떳떳하게 어른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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